 선생님께
선생님께
제 방에서 보면 멀리 남한 산성의 능선이 마치 누워 있는
임산부처럼 보입니다. 창 가의 책상에 앉아, 겨울 하늘한
번 쳐다보고, 남한산성 한 번 쳐다보고, 그러다가 글도쓰
고 시도 읽고, 공부도 하다가, 문득 나는 무엇을 낳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팍팍한 몸과 마음이 문득 안타깝습니다
얇디 얇은 존재 하나를 뚫고 나오는 데 60년이 걸렸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가슴을 칩니다. 몇 번 윤회를 거듭해야
제 존재를 뚫고 나갈 수 있을까요. 어디가 바깥일까요.
감사한 선생님의 시집 책상에 두고 이렇게도 읽고 저렇
게도 읽고, 옆으로도 읽고 거꾸로도 읽고, 왼편 언덕 나
무들에게 읽어주고, 부엌에서 설거지하시는 어머님의
노래가락 속으로도 읽고, 음악더러 읽어보라고 페이지
를 넘겨주기도 하고, 구름 하나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동안도 읽고, 눈 감고도 읽고, 시집 속으로 들어앉아 읽
고, 여백 속에서 놀면서 읽고, 그러다가 안읽히면 페이
지의 숫자랑 놀기도 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먼 바다 등을 밀어주'(바다밖에서의 목욕)
기도하고 '제 몸의 것을 제 맘대로 떨어버리지 못하'(떠
난 새집)는 나무가 와서 놀다가고, '수수비를 타고'(서울
회색 종점) 비가 오기도 합니다. 얼마나 많은 '창없는 겨
울'(창없는 겨울이 지나간다)이 가슴 속으로 지나 가야
'두 아이를 낳고 두 아이를 지운'(엄마의 풍선을 찾아가는
풍선의 노래) 마음을 알 수 있게 될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管같은 삶, 棺같은 내사랑'(소극적인 대책) 을 알 수 있게
되는 날은 언제일런지 '끝끝내 풀리지 않아 떠내야 하는
부분'(밥으로 죽끓이기)을 아직 붙들고 있는 어리석음이
고즈넉한 오후에 실핏줄을 건드려 겨울 하늘은 온통 실핏
줄같은 통증 가득합니다.
선생님의 시집 속의 시 '둥글고 환한 구멍'을 읽으면서
무언가 쓰고 싶어졌습니다. 제게는 그 시가 욕망 그리고
욕망 의 흔적의 메타포가 읽혔습니다. 제 시 읽기야 언제
든지 오독이지만요. 생각하면 모든 욕망은 대상이 아닌
흔적 뿐이라는 게, 긁고, 끈끈하고 얼음이 쩍쩍 붙는, 이
감각적 이미지들과 둥글과 환한 구멍 바닥의 나무 그림자
이미지들과 함께 읽혔습니다. 왜 그렇게 읽혔는지는 저도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읽고 쓰면
서 제 마음자리를 찾아 보려고 합니다. 결국 시를 읽는일
은 제 마음자리 더듬어 가는 일 아니겠는지 생각합니다.
겨울 안부를 묻는다는 것이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습니다
감히 선생님의 시구들을 함부로 인용한 것 노여워하지 않
으실지 걱정됩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전화드리고 한 번
찾아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선생님, 선생
님을 생각하면 늘 감사한 마음과 즐거운 마음이 한데 어
울려 따듯하고 행복해집니다.
한용국 드림
추신 : 참, 선생님, 포엠게이트로 들어가는 방법
가르쳐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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