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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이상/오감도  

*이 글은 필자이신 황현산 선생님의 허락을 현대시다락방에서 옮겨둡니다. 귀한 원고를 주신 황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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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상 /『烏瞰圖』의 「詩第一號」에 과거가 없다


                                                                                  황   현   산  


       
李箱은 불행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가난과 질병 속에서, 시와 소설을 망라한 그의 작품들이 제대로 이해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사후에도 그에 대한 이해가 현격하게 깊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초현실주의자니 아방가르드니 하는 적절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꼬리표를 늘 달아야 했고, 때로는 "우리 문학의 정상"에 우뚝 섰다는 찬사를 얻기도 했으며, 말과 씨름을 했던 그의 문학이 여러 가지 새로운 착상을 촉매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그 난해하고 착종된 문장 때문에 어떻게 해석해도 좋을 것처럼 보이는 그의 텍스트들이 온갖 수상한 문학 이론들의 겉치장으로 이용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가 이해되지 못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오해의 상당수는 그의 텍스트가 제대로 교열되지 못한 데서도 비롯하였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한 문학연구자의 「詩第一號」에 대한 분석에서 필경 그 단적인 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詩第一號」를 임종국이 편집한 『李箱全集』에 따라 적으면 다음과 같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1)


위에서 말한 연구자는 그의 <분석>에서, 이 시의 제16행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다른 시구들이 모두 현재형으로 진술되고 있는데, 이 시구에서만 과거형이 두 번 나타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는 이 과거시제에 대해, "이 시의 경험 세계가 우리 눈 앞에 극적으로 전개되는 것 같은 시적 환영에 대한 집약 혹은 요약적 처리로 이해된다"2)고 말하고 이를 다시 복잡한 내용의 한 문단을 덧붙여 설명한다. 이 분석은 매우 정치한 외양을 지녔지만 그 내용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볼 수는 없다. 「詩第一號」에는 무엇보다도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위 제16행에서, 앞의 "모였소"는 문법적 시제로는 과거이지만 의미내용으로는 현재의 정황표현이다. 즉 <모여 있오>와 같은 말이니 과거상이 없다. 문제는 뒤의 "나았소"에 있을 것 같은데, 이 역시 과거가 아니다. 이상이 「朝鮮中央日報』에 연재했던 『오감도』에서 이 시의 제16행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러캐뿐이모혓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3)


여기서 문제의 형용사 "나았소"는 "나앗소"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 임종국은 위에서 보듯이 그가 편집한 전집에서 "나았소"로 교열했고, 다른 전집들이 모두 이를 답습했다. 이상은 『오감도』의 다른 두 시에서 <졸다>를 <조올다>(「시제2호」)로, <알다>를 <아알다>(「시제6호」)로 쓴 것처럼 장음 표기에 주의를 기울렸다. 이 "나앗소" 역시 장음으로 표기된 '낫소'일뿐 과거형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알다싶이 이상은 건축기사였다. 과학자로 훈련을 받았고, <과학>에 의해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뽑혀 나왔던 그에게 근대의식이란 곧 과학정신이었다. 그는 글 쓰기에서 또 하나의 근대를 만났을 때, 일상적?관용적인 말투와 과학적 표현을 자주 대질시킴으로써 이 과학정신을 과시하였다. 「시제1호」를 이해하는 한 길도 이 대질의 한 방식을 거기서 발견하는 데에 있을 것 같다. 일상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의 대질이란 결국 불분명한 표현과 분명한 표현의 대질이다.

이 시에서 숫자 "十三"이 무엇을 뜻하느냐를 묻지만 않는다면 진술이 불분명한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등의 시구에 나타나는 <무섭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형용사 <무섭다>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성질이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끼게 할 만큼 사납거나 거세다>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누가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게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끼다>의 뜻이다. 형용사 <무섭다>는 대상의 성질을 서술할 수도 있고 그에 대한 주체의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다. 누가 <친구들을 협박한 그 아이는 영악하고 무섭다고 그리오>라고 하면 앞의 뜻으로 말한 것이고, <호랑이를 보고 그 아이는 무섭다고 그리오>라고 하면 뒤의 뜻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에서부터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까지의 시구에서는  형용사 <무섭다>가 어느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알기는 어렵다. 독자가 이 시의 전반부를 읽으면서 13인 아이들을 <무서움을 느끼는> 아이들로만 여기게 되었다면, 그것은 <이 아이들이 도로로 질주한다>거나 <길은 막달은 골목이 적당하다>는 등의 정황 표현에 잘못 유도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초두에서 "適當하오" 같은 헐렁한 표현으로 일단 설정하는 척했다가, 제16행과 마지막 2행에서 다시 철회하게 되는 이 가변적인 정황을 한켠으로 제쳐 놓는다면, <무섭다>의 상반된 의미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채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하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 정황이야 어떻든지 간에 한 아이를 가르켜 무서운 아이라고 말한다면 그 아이는 사납고 무서운 아이일 수도 있고 무서워 떠는 아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이 제16행에서 서술하는 바도 이 내용과 부합한다 :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13명의 아이가 모두 <무서운 아이>라고 말해 놓고, 다시 그 아이들이 모두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 하는 아이로만 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서운 아이가 무서워 하는 아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 거의 똑같은 문장을 13번이나 반복하여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제3행에서 제16행까지의 시구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을 수학공식처럼 요약하여 다음 <진술 1>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다.


   진술 1 : 무서운 아이는 곧 무서워 하는 아이요, 무서워 하는 아이는 곧 무서운 아이다.


한편, 시인이 설정하는 척했다가 철회한, 우리가 <가변적>이라고 했던 정황과 관련해서도 또하나의 진술을 정리해낼 수 있다. 시인은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라고 했다가 다시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라고 말을 바꾼다. 이 두 문장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길은 막다른 골목이어도 좋고 뚫린 골목이어도 좋다>가 되고, 이를 다시 다른 말로 바꾸면 <막다른 골목이나 뚫린 골목이나 똑같다>가 된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진술 2>로 정식화할 수 있다.



   진술 2 : 뚫린 골목이 곧 막다른 골목이요, 막다른 골목이 곧 뚫린 골목이다.



이상은 이와 같은 내용의 말을 그의 소설 「地圖의 暗室」에서도 쓰고 있다 :"活胡同是死胡同 死胡同是活胡同".4) 白話文으로 쓰인 이 말을 한국어로 옮기면 <진술 2>와 같은 말이 된다 : "뚫린 골목이 곧 막힌 골목이요, 막힌 골목이 곧 뚫린 골목이다".

이상은 「詩第一號」에서, 위의 <진술1, 2>로 정리된 두 문장을 마치 조각그림맞추기 퍼즐처럼 풀어 흩어놓고 있다. 모순어법에 바탕하는 이 두 문장에 대해서는 정신분석학적이건 기호학적이건 사회역사적이건 간에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문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인이 이 시에서 말의 일상적 쓰임과 과학적 표현을 대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상언어에서 의식없이 사용되고 있는 <무섭다>라는 말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진술 1>로 하나의 문장 틀을 고안하고, 그 틀에 맞추어 그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인 <진술 2>를 얻어낸 다음, 이를 다시 작시의 수단을 빌려 파편화하였다. 사실 <진술 2>는 그의 평생의 화두였다. 그는 스스로 재능을 타고났다고 믿었으나, 가난과 병고로 모든 활로가 막다른 길로 되어버린 처지에서, 운명을 넘어서는 유일한 수단일 <예술>로 막힌 길을 뚫린 길로 바꾸고 싶어 했다. "뚫린 골목이 곧 맏다른 골목이요, 막다른 골목이 곧 뚫린 골목이다"는 일종의 정언적 명제이다. 한 시인이 자기 개인의 우연한 운명에서 예술가 일반의 보편적?필연적 운명을 보기 위해서는 자기 운명을 정언적 명제로 말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기댈 수 없는 자가 진리에 기대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점에서도 「詩第一號」에 과거가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진리에는 단 하나의 시제, 곧 영원한 현재가 있을 뿐이다.

       
1) 林鍾國 編, 『李箱全集·第二券·詩集』, 泰成社, 1956, pp. 21-23.

2)  이승훈, 「<오감도 시제1호>의 분석」, 김윤식 편, 『이상문학전집 4, 부록 - 이상연구에 대한 대표적 논문 모음』, 문학사상사, 1995, p. 331.

3) 1934년 7월 24일자 『朝鮮中央日報』 문예면.

4) 『李箱全集·第一券·創作集』, p.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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