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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상의 BOITEUX·BOITEUSE
*이 글은 현대시 다락방 [다락방에서 시읽기]에 실린 황현산 선생님의 글입니다. 황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옮겨둡니다. 이 글을 쓰시게 된 동기와 함께 읽어보세요. (2001년 10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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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BOITEUX·BOITEUSE
황 현 산
지금 창비 자유게시판에서는 불문학박사 한 분이 이상의 시 BOITEUX·BOITEUSE를 열심히 해설하고 있다.
이상은 재주가 많아 기이하고 재치 있는 시들을 많이 썼지만, 거기에 깊은 사상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초자아가 아주 강한 사람이어서 자기도 모르는 어떤 것(요즘말로 하면 타자의 목소리)이 시구 속에 발성되는 일도 거의 없다. 그의 시는 평범하고 단순하게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사기를 치고 노가리를 풀게 된다. 문제의 시는 다음과 같다.
BOITEUX·BOITEUSE
긴것
짧은것
열十字
×
그러나CROSS에는기름이묻어있었다
墜落
不得已한平行
物理的으로아팠었다
(以上平面幾何學)
×
오렌지
大砲
匍匐
×
萬若자네가重傷을입었다할지라도피를흘리었다고한다면참멋적은일이다
오―
침묵을打撲하여주면좋겠다
침묵을如何히打撲하여나는洪水와같이騷亂할것인가
침묵은침묵이냐
메쓰를갖지아니하였다하여醫師일수없는것일까
天體를잡아찢는다면소리쯤은나겠지
나의步調는繼續된다
언제까지도나는屍體이고자하면서屍體이지아니할것인가
1931. 6. 5
제목 는 프랑스어로 <절름발이>라는 뜻의 명사 또는 형용사로 각기 남성형과 여성형이다. 두 단어를 연속해서 읽으면 <부아뙤 부아뙤즈>가 되는데 이 발음이 그 자체로 <절음발이>의 걸음걸이에 대한 의성어나 의태어의 구실을 할 수 있다. 이 제목은 이상의 재치를 잘 보여준다.
이 시의 본문은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분은 X나뉘어 있다.
첫부분,
긴것
짧은것
열十字
긴 것과 짧은 것은 절름발이의 두 다리일 텐데 그 둘을 가로세로로 겹쳐 놓으면 <열十字>가 된다. 이 열십자는 기독교의 상징체계에 따라 <십자가가 고난>을 의미한다. 절름발이는 그 다리 자체에 <십자가의 고난>에 비교될 만한 극심한 고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벌써 십자가가 된 이 열십자는 시의 둘째 부분에서 연상작용에 의해 또다른 것으로 바뀐다.
그러나CROSS에는기름이묻어있었다
墜落
不得已한平行
物理的으로아팠었다
(以上平面幾何學)
여기서 CROSS는 열십자로부터 연상된 <네거리>이다. 절음발이는 그 네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 탓이었는지 그 네거리에는 기름이 발라져 있어 절름발이는 넘어졌다. 즉 <추락>했다. 넘어진 그의 몸뚱이는 <부득이>하게 땅바닥과 <평행>을 상태가 되었다. 당연히 그는 아팠다. 그런데 이 아픔은 <십자가의 고난> 같은 그런 수사학적 추상적인 아픔이 아픔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아픔이었다. <以上>이 한 사람의 추락과정을 <平面幾何學>적으로 서술한 내용이다.
문제는 셋째 부분의 다음 시구에 있다.
오렌지
大砲
匍匐
무슨 소리인가? 건축기사였고 수학 실력을 뽐냈던 이상은 여기서도 필경 원추곡선이론의 개념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오랜지>는 원이며, 원은 완전한 상태를 나타낸다. <대포>는 포탄을 발사할 때, 그 포환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포복>은 지표면을 따라 기어가는 것으로 직선에 가까운 선을 그리게 된다. 원에서 포물선을 거쳐 직선에 이르는 이 과정은 충만했던 생명이 엔트로피가 높아져 <추락>하게 되는 과정과 다른 것이 아니다.
네 번째 부분은 비교적 긴데, 이 추락에 대한 일종의 해설이다.
萬若자네가重傷을입었다할지라도피를흘리었다고한다면참멋적은일이다
중상을 입은 자가 그 상처에 대해 <피가 흐른다>든지 뻐가 부러졌다든지 하는 식으로 사실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이상의 미학적 취향에 어긋나는 일, 곧 <멋적은일>이 된다. 그래서 이상 자신은 위와 같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자신의 감정과 속내가 전혀 들어나지 않을 수학적인 표현들을 동원하여 쓰는데, 이런 괴이한 말은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기에 <침묵>이나 다를 바 없다.
오―
침묵을打撲하여주면좋겠다
침묵을如何히打撲하여나는洪水와같이騷亂할것인가
침묵은침묵이냐
시인은 이 <침묵>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打撲>은 '심하게 때린다'는 뜻이며, 그 한자음인 <타박>은 우리말로 '허물을 들추어 비난한다'는 뜻이다. 이상은 누가 자신을 구타하고 비난이라도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비난이라도 반응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이상은 이 <침묵> 이외의 다른 대안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침묵>이 침묵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기능을 할 수는 없을 것인지 묻고 있다.
메쓰를갖지아니하였다하여醫師일수없는것일까
天體를잡아찢는다면소리쯤은나겠지
이상은 다시 묻는다. <메쓰>라고 하는 실용적인 도구를 지녀야만 의사인가? 다시 말해서 말을 실용적으로 써야만 시인인가? 말을 도구적으로 사용하여 일반인들과 소통을 시도하기보다 말에 다른 기대를 걸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천체>를 찢는 천둥소리를 울릴 수도 있지 않을까? 독자들은 도구로서의 말을 요구하고 이상은 어떤 경악의 소리를 발명하려 한다. 이점에서 <절름발이>는 시인으로서의 이상이 독자들과 맺고 있는 관계이다. 한쪽에서는 말을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침묵>밖에는 듣지 못하는 관계.
나의步調는繼續된다
언제까지도나는屍體이고자하면서屍體이지아니할것인가
이상은 침묵을 포기하지 않고 독자들과 절름발이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침묵>으로밖에 말할 수 없다면 시인 자신은 죽은 <시체>와 다름없는데, 이 시체의 침묵 자체가 침묵을 깨뜨리는 특별한 말이 되어 그가 시체의 상태를 벗어날 길은 없을 것인가? 이상은 이렇게 자문한다.
독자들의 몽매함 때문에 자신의 <침묵>이 소통되지 않아, 자신이 독자들과 절름발이의 불행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물론 잘못 생각한 것이다. 소통을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보기도 전에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자기 시의 소통불가능성을 그 위대성으로 여기는 행위야 말로 전형적인 자기기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한다면 이상이 너무 불쌍하다. 시에 '메쓰를 든 의사'에 관한 언급도 있었지만, 이상은 이 시를 쓸 때, 당시로서는 불치병이나 다름없는 패결핵 환자였다. 실제적인 것에 아무 기대를 걸 수 없는 사람이 비실제적인 것에 의지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말이 실제적인 힘보다 더 큰 힘, 어떤 특별한 힘을 지닐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비현실적인 것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 비실제적인 것이 신비종교나 신비의약품 같은 것이 아닌 '말'이었다는 점은 유념해둘 필요가 있겠다. 게다가 그는 괴이한 말을 하면서도 수학식이나 과학용어 등을 이용하여, 그 비실제적인 것이 현실적 실제적인 것과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어떻게든 설치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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