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37 : [김정란],<세계사 시인선>에 대한 문학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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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세계사 시인선>에 대한 문학적 평가

*이 글은 세계사 시인선 100호 기념 특집으로, <작가세계>에 실렸던 글을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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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전위를 지켜온 외로운 선택

-<세계사 시인선>에 대한 문학적 평가

김정란(시인, 상지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한 출판사의 문학적 경향, 또는 수준은 그 출판사의 <시인선>으로 가장 잘 드러난다. 문학은 언어의 자의식을 통해 구성되며, 언어적 자의식의 전위를 형성하는 것은 언제나 시이기 때문이다. 한 문학 출판사가 어떤 문학을 지지하고 있는지, 그 문학의 궁극적 색채가 어떤 것인지, 그 출판사가 겉으로 표방하는 문학적 입장과 실제로 지지하는 문학이 같은지 다른지, 또 과연 정리되어 있는 분명한 문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그 출판사의 <시인선>을 살펴보면 된다. <시인선>은 그만큼 한 출판사의 문학적 자의식(또는 언어적 자의식)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시>를 제대로 모르면, 문학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 장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를 사용해서 말한다면, <시의 선택>을 놓고, 한 출판사의 편집자는 자신의 문학적 정확성을 질문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 의미에서 정치성을 명확히 하라는 요구와 같다. 탈근대사회에서 문화를 다루는 자는 언제나 정치적 정확성political correctness을 드러낼 것을 주문받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기타 다른 장르와 달리, 시의 선택은 언어적 의미에서 정치적 정확성을 숨길 수 없다. 내러티브 뒤에 숨어서 언어적 자의식을 숨길 수 있는 소설과 달리, 시는 언어 그 자체가 정치성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세계사의 문학적 입장은 아주 뚜렷해 보인다. 세계사는 어떤 출판사보다도 확신을 가지고 실험성있는 문학에 투자해 왔다. <세계사 시인선>의 성격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인선은 한국 문단 안에서 아주 독특한 입지를 구성하고 있다. 알려진 대가급 시인들보다도 젊고 발랄한 힘없는 목소리들을 발굴하는 데 더 힘을 기울여왔던 것이다. <세계사 시인선>은 한국의 어느 출판사의 시인선보다도 탈권력적?탈중심적인 언어의 전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한 출판사로서는 내리기 쉽지 않은 결정이다. 권력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언어의 전위>를 고수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더군다나 대중의 정서적 수준이 그토록 완강하게 전근대성을 고수하고 있는 사회에서), 또 아무래도 상업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전위>, 그 외로운 위치. 보이지 않는 앞을 향해 가면서(비물질적 존재, 또는 구성되기 이전의 희미한 존재의 예감 또는 밑그림을 바라보며), 보이는 뒤로 돌아서서(인식적으로 명확히 후위인, 그러나 이미 그려져 있는 명확한 존재, 따라서 늘 사회 안에서 더 힘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이상한 전선. 이건 민망한 전선이다. 싸워야 할 대상도 싸움의 목표도 분명하지만, 도무지 이길 수 있는지, 또 이긴다 한들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언제나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최고급의 인식, 그러나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너무나 무력한, 부르디외의 놀라운 용어를 사용하자면, 신체 안에 쌓인 무의식적 관습의 집합인 대중의 <아비투스>와 싸우는 소수의 <아비투스>. 또는 아직 구성되지 않은 <아비투스>. 사회가 그 의미를 인정해 주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시는 근대 이래 언제나 스스로의 자리를 대중의 언어적 아비투스 맞은편에 세우며 성장해 왔다. 그것이 시의 가장 명백한 존재 이유이다. 또는 비극적 보상이다.
그러나 너무나 시인을 닮은 이 사회학자의 또다른 놀라운 표현을 빌면, <인간은 인간에 대한 신이거나 인간에 대한 늑대이다>. 인간은 인간에 의해 구원받거나 인간에 의해 버림받는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기대할 수 있다 한들, 신의 일마저 인간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문장은 예감의 칼처럼 내 가슴에 깊이 꽂힌다. 나는 부르디외를 따라 세상 속으로 깊이 걸어들어간다. 이 선택은 너무나 옳다. 예수도 구질구질하게 세상 안에서 승부를 걸지 않았던가. 세상에, 질 줄 뻔히 알면서, 등신같이! 세상, 힘센 현재의 말들의 亂場 속에서 미래의 무력한 말들을 팔겠다고! 늑대들 앞에 서서 날 잡아잡수 하고 대가리를 들이밀었던 미련한 양. 그 시장에서 여자와 가난뱅이들이 특히 그의 미련한 말을 쫑끗 귀기울여 들었다. 그러나 물론, 숨어서 그를 사랑했던 부자들과 지식인들과 권력자들도 있었다. 본디오 빌라도는 그의 정치적 심문에 "그건 너의 말이다"라고 맞받아치는 가난뱅이 예수의 당당함에 질려서, 부랴부랴 손을 씻지 않았던가. 적어도 그는 새로운 상징 권력의 도래 앞에서 겁에 질릴 줄 아는 늙은 상징 권력이었다. 미래의 말은 그렇게 언제나 인간에 대한 늑대들 앞에서 인간에 대한 신이 되겠다고 하다가 얻어맞고 놀림당하고 잡혀먹힌다. 아이구, 누가 너더러 그런 거 하래? 국으로 시키는 말이나 따라 하다가 나누어주는 상징의 분가루로 곱게 단장하고 지내다 곱게 가면 되지. 하늘 아래 새것이 어디 있냐? 그 일은 언제나 세계의 시장 바닥, 상징의 <場champ>에서 벌어진다.
그러나 일생동안 시의 길을 따라온 자들은 알고 있다. 바로 그 세상의 장터에, 인간이 인간의 신이며 늑대인 그 장터에 장을 무화시키는 다른 장이 겹쳐져 있다는 것을. 그래서 시인들은 존재 안에서 존재 밖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들은 존재의 모든 투쟁이 맥락을 벗어나는 지점까지, 멀리, 가슴속의 모든 고뇌가 현상학적으로 투명해지는 자리까지 움직인다. 그러면 시가 무엇인지 보인다. 그건 인간의 마음이 알고 있는 천사의 마음이다. 그건 인간을 인간에 대한 신으로 만드는 인간의 말이다. 바이킹의 전장의 신, 발키리가 왼손에 잡고 있는 투명한 검. 인간의 사회적 삶이라는, 장에서 이루어지는 <상징적 싸움>이라는 말의 전쟁터, <무의미를 벗어나 알려지고 인정된 사회적 존재를 위한, 삶과 상징적 죽음을 위한 생사의 투쟁>에서 발키리는 전사의 손을 오른손으로 잡고 왼쪽 방향을 검으로 가리킨다. 또는 장 안에 있는 자를 장 안에 있는 채로 장 밖으로 돌려세운다. 시인의 존재를 둘러싸고 장들은 겹치고 얽히고 부서지고 생성된다. 그의 존재 안에서 그렇게 상징들은 장 속으로 들어갔다 장 밖으로 나왔다를 반복하면서 기왕의 상징들과 싸운다. 그러면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간다. 인간에 대한 신의 역할을 하는 인간의 언어를 찾아내기 위해서.

세계사의 시인선은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새로운 언어의 아비투스를 구성하려고 애쓰는 힘없는 시인들에게 방점을 찍어 왔다. 다른 출판사들이 어떤 진영을 형성하고 그 안에 안주하며 권력을 발생시키는 동안, 이 출판사는 다만 <문학적>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왔다. 겉보기에 전위적으로 보이는 다른 출판사들의 시인선이 오히려 전통적인 정서나 상업주의적 색채를 고수하거나 또는 일관성없이 흔들리는 데 반해서, 세계사의 시인선은 놀라울 정도로 참신하고 전위적이며, 상당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거의 <비타협적>이라고 보인다. 한국 문단의 전반적 행태를 감안할 때, 이 특징은 대단히 신선하고 놀랍다. 물론, 모든 시인선이 그렇듯이 경향이나 수준, 그리고 시인들의 선택 기준이 이따금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사 시인선의 대체적인 방향은 한국의 어느 출판사의 시인선보다도 분명하다. 과감한 실험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출판사의 출판 행태가 한국 문학의 큰 특징을 구성하고 있는 연고주의나 온정주의, 그리고 90년대 들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업주의와 무관했기 때문에(적어도 <시인선>에 있어서만은 세계사의 선택은 <문학적 고려>가 매우 두드러진다)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된다.
<세계사 시인선>이 아니면 따를 수 없었을 원칙에 의해 선택된 시인들이 이 시인선에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이연주, 김신용, 박순업, 이향지, 진이정, 허연, 노태맹, 이경림, 김형술, 박서원, 김언희, 박상순, 성미정, 김상미, 박정대, 이수명, 함기석, 최정례(지금 출간 준비중인 김윤배, 박남철, 노혜경 등도 꼽을 수 있다) 등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한국 시단에서 주류에 편입되기 힘든 시인들이다. <세계사 시인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빼어난 시인들을 십중팔구 잃어버렸을 것이다.
이 시인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특징인 전위성은 시인들의 선택 기준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세계사는 다른 출판사에 의하여 발굴되어 이름을 얻은 시인들보다는 무명 상태의 시인들을 발굴하고 기르는 데 단연코 힘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한국 문단에서 이것은 아주 귀한 태도이다. 실제로 진이정, 박상순, 박서원, 성미정, 이경림, 이향지 등 90년대 한국 시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인들은 이 시인선이 아니었다면 그 가치를 증명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인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선보인 뒤, 90년대 시단의 스타급 시인으로 부상한 시인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90년대 후반의 중요한 시인들이 대거 <세계사시인선>을 통해 역량을 증명받았다고 말해도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세계사 시인선으로 독자에게 선보인 시인들 중에서 많은 시인들이 메이저급 출판사로부터 출판 제의를 받은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이 시인선의 선자들이 눈이 좋고, 또 그들의 선택 기준이 문학적으로 경쟁력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점에 관해서 <세계사 시인선>은 그간 이 시인선을 이끌어왔던 황현산, 이승훈, 최승호 제씨의 밝은 눈과 불편부당한 문학적 태도에 빚지고 있다. 또한, 아무런 문단적 혜택도 누리지 못하는 무명 시인들의 시집들을 상업적 부담을 마다 않고, 문학의 미래를 위해 출판해 온 세계사 최선호 사장에게도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러한 선택 기준은 {작가세계} 신인 시인 선발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일 년에 두 번 실시하는 <작가세계 신인상>에는 매번 수 백 명의 지원자들이 수 천 편에 해당하는 시들을 응모해 온다. 시의 면면을 살펴보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가는 예심에도 올라가지 못할 전위적인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새로운 말들이 대거 {작가세계}로 몰리는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세계사 시인선>이 독특한 색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작가세계}의 신인 시인 선발은 세계사의 특징적 색채인 전위성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빼어난 작품일 경우, 그것이 세계사의 전체적 입장에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문학적 진취성을 가지고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선택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언어적 새로움이 있는가를 반드시 살폈다. {작가세계}가 신인들에게 하는 주문은 늘상 한결같다. 손끝 재주보다는 정신의 패기를 지니라는 것이다. 앞으로도 {작가세계}와 세계사의 시 선택이 그러한 <비타협적> 색채를 유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가 점점더 대중의 가려운 다리나 긁어주는 <느끼한> 대중가요나,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나른하고 부드러운 <맛사지> 수준으로 떨어지는 요즈음, <세계사 시인선>의 참신함이 가지고 있는 힘은 너무나 크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칼칼하게 시대의 전위 역할을 하는 당당하고 품격있는 언어를, 그러면서도 세계를 관통하는 치열한 현실인식을 지닌 살아있는 언어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 주기 바란다.

*세계사 시인선 100호 기년 특집에 실렸던 글. <작가세계> 1999년 가을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