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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장희/청천의 유방  

*이 글은 황현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현대시다락방>에서 옮겼습니다. 좋은 글을 주신 황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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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제11화

이장희 - 푸른 하늘의 유방


       

                             황  현  산 (문학평론가)
       

 

내 기억을 믿을 수는 없지만 필시 1978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 해에 한 문학잡지가 李章熙의 유작을 발굴하였다는 득의만만한 광고와 함께 십여 편의 시를 전재하였다. 이 시들은 얼마 후 박용철의 작품으로 밝혀졌지만, 처음 그것들이 이장희의 소작일 수 없다고 주장하며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던 것은 당시 아직 시인으로 등단도 하지 않았던 최승자였다. 어떻게 이 시들이 이장희의 작품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었느냐고 내가 물었더니 최승자가 대답했다 : "너무 말이 많고 그 말들이 너무 두터워서......"

식민지시대에 말이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넘쳐났던 시인 가운데 하나가 전회에 이야기했던 이상화라면, 말이 가장 적었던 시인은 이장희였다. 백기만은 1951년에 이미 타계한 이 두 시인의 유작과 문우로서의 추억을 묶어 『尙火와 古月』이라는 한 권의 책을 펴냈다. 한 쪽이 언제나 그 순간을 태우기 위해 미래에 거는 불꽃이라면 다른 쪽은 벌써 사라져 버린 차거운 달이다. 백기만의 추억에 따르면 고월에게서 적고 작았던 것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뿌리를 허공으로 들어올리는 난초처럼 지상에 대한 열의와 기대를 모두 거두어 들인 가운데 가장 작은 삶을 살았다. 그는 짧은 생애를 살았고 그의 시들은 짧다. 그의 유작들은 자주 쓰다가 중단된 시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중단된 시들을 읽다보면 거기에 덧붙일 수 있는 말들을 생각해내기는 어렵다. 시가 거기서 완결되어 있다는 뜻이기보다는 시를 중단하기 전에 말들이 먼저 없어져버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길면 땅에 닿을 것이고 땅에 닿으면 흙이 묻을 것이다. 이장희에게서 말은 시의 진행과 함께 순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렵혀지기 전에 사라진다. 주요한의 그 요란하고, 그래서 흥취를 얻는 「불놀이」에 비해 같은 제목을 가진 이장희의 다음과 같은 시는 무엇일까.

     

    불놀이를

    시름없이 즐기다가

    아뿔사! 부르짖을 때

    벌써 내 손가락은

    발갛게 되었더라.

     

    봄날

    비오는 봄날

    파랗게 여윈 손가락을

    고요히 바라보고

    남모르는 한숨을 짓는다.

 

시는 두 개의 5행련으로 끝난다. 첫 연은 불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손에 (육체적인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심리적인) 화상을 입은 이력을 말하고, 다음 연은 봄 추위에 파랗게 얼어붙은 그 손을 바라보는 심경을 읊는다. 독자는 이 대립되는 두 연 뒤에 그에 대한 해석이나 교훈, 또는 그 심경의 다른 깊이를 말할 결구를 기대하지만 그렇게 이어질 말들은 "남모르는 한숨"과 함께 이미 잦아들었다. 이렇듯 한숨 속으로 말들이 사라질 운명은 시의 내용에 벌써 잠복하고 있다. 첫 연에서 손을 데게 했던 불길은 둘 째 연에서 추워하는 손에 어떤 온기도 남겨 놓지 않았다. 오히려 불길은 그 손을 여위게 함으로써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이 육체의 부분이 봄의 잠재된 온기에 걸어야 할 기대를 꺾어버렸다. 불놀이하던 소년은 성장하지 않았으며, 그 기억의 근처를 맴돌면서 동시에 놀라 실색하는 말들은 발전하지 않는다.

고월의 짧은 생애는 백기만의 담담하면서도 애절한 추억담과 제해만의 근면한 탐구에 힘 입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이장희는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11월에 대구의 한 갑부의 아들로, 12남9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어머니가, 스물 세 살에 계모가 타계했다. 그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크지 못했으며, 갑부의 아들이었지만 경제적으로 곤궁했다. 총독부의 중추원참의였던 아버지는 일인들과의 빈번한 접촉을 위해, 일본 京都中學을 졸업한 이장희의 일어 능력을 빌리려 하였으나 아들은 모든 협력을 거부하였다. 아버지는 총독부의 관리직을 마다하는 이 버린 자식에게 <매달 15원의 월급>을 주어 끼니를 잇게 했다. 고월은 집안과 집밖에서 <더러운 속옷과 양복 한 벌>로 몸을 가리고, 겨울에도 불을 지피지 않은 냉방에서 살았다. 고월에게서는 한 가족사의 비극이 조국없는 젊은이의 비극과 그대로 겹쳐 있다. 그는 단지 속물들을 만날 수 있을 뿐인 세상과의 교제를 최소한으로만 유지하였으며, 모든 종류의 인사치례를 견디려 하지 않았다. 결혼한 몸이었지만 혼자 살았다. 한 개의 점으로 살았던 그에게 자양은 청천에 있었다. 다음은 「靑天의 乳房」이다.

     

    어머니 어머니라고

    어린 마음으로 가만히 부르고 싶은

    푸른 하늘에

    따스한 봄이 흐르고

    또 흰 볕을 놓으며

    불룩한 乳房이 달려 있어

    이슬 맺힌 포도송이보다 더 아름다와라

    탐스러운 乳房을 볼지어다

    아아 乳房으로서 달콤한 젖이 방울지려 하누나

    이때야말로 哀求의 情이 눈물 겨웁고

    주린 食慾이 입을 벌리도다

    이 無心한 食慾

    이 복스러운 乳房......

    쓸쓸한 心靈이여 쏜살같이 날을지어다

    푸른 하늘에 날을지어다1)

 

제해만은 이 시의 상징체계를, <푸른 하늘>이 어머니라면, <태양>이 유방일 터이고 <흰 볕>은 곧 젖이며, 거기서 <방울지려> 하는 것은 모정이며, <哀求의 情>과 <食慾>은 모성에의 그리움이며, <쓸쓸한 심령>은 시인인 고월 그 자신이라고 명료하게 정리하였다.2) 태양으로부터 만물의 자양이 비롯한다는 생각은 아마 자연과학적인 진실에도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장희에게서 이 비유의 체계는 어떤 우주론적인 유추에 머물지 않는다. 푸른 하늘에 달린 유방은 선명하고 그것을 향하는 시인의 그리움은 간절하여 이 정황은 상징으로 쉽게 환원되려 하지 않는다. 유방은 바로 시인의 안전에, 봄 하늘에 있다. 유방은 거기 있으며, 거기 있는 것은 상징이 아니다. 시인은 젖을 뗀 후 다시 어머니의 젖가슴을 발견하고 슬프게 경탄하는 아이처럼 하늘의 젖가슴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한다. 하늘에 유방을 둔 자는 천애의 고아이며, 그 유방에 무심하게 식욕을 느끼는 자는 언제까지나 소년인 사람이다. 고월은 그 하늘의 젖으로 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 전체를 그 댓가로 지불하고 그 유방에 닿기 위해 하늘로 날아오르려 한다. 「靑天의 乳房」의 섬찟한 아름다움이 거기서 비롯한다.

시를 순결한 언어라고 말한다면, 시는 소년으로 남아 있는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 어느 정도는 이 규정 속에 포함된다. 성장한다는 것은 아마도 세상의 크고 작은 파열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 들이고 그 앞에서 심리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파열을 모르는 세계는 어머니의 세계이며, 한 자아와 세상 사이에 틈을 모르는 최초의 순결함이 이 어머니의 낙원에 있다. 그래서 여러 종류의 시인을 어머니가 만든다. 보들레르에게는 어린 자식을 데리고 제가한 어머니가 있으며, 랭보에게는 그 유명한 <마담 랭보>가 있다. 서정주에게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을 물러주었다는 외할아버지도 이 어머니 낙원의 한 그림자이다. 『삶은 다른 곳에』에서, 낭만주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시인들을 한데 뭉뚱그려 야로밀이라고 하는 시인을 만들어낸 쿤데라는 시인과 함께 가는 어머니, 상상적으로는 아들이 사랑을 나누는 침대에까지 따라 들어가고, 물질적으로는 그 죽음의 침대에까지 동행하는 한 어머니에 관해 말한다. 시인은 파열한 세계 속에 어머니의 균열 없는 낙원으로 섬을 만든다.

그러나 어머니는 실제로 무엇인가. 어머니는 그 낙원의 최초 제공자이지만 또한 그 낙원의 침입자이다. 시인인 아들에게 그 파열의 섬찟한 첫 경험은 어머니에게 있으며, 어머니는 균열된 세상에 등을 돌리고 아들을 끌어 안을 때도 그 세상으로 아들을 떠밀 때도 낙원과 세상의 경계에 있고, 그 파열의 제일선에 있다.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르면 보들레르는 어머니의 재혼과 함께 돌이킬 수 금가버린 세상을 보았으며, 랭보는 어머니의 <어둠의 입>에 의해 그 에로스에 극심한 타격을 입는다. 서정주에게서 <애비>와 함께 <잊어버려>야 할 <에미>는 <누님>으로 둔갑해 나타날 때만 어렵게 시인의 동지가 된다. 시인은 이제 어머니 없이 어머니의 낙원을 봉쇄하겠지만, 그 상상의 어머니를 강화하기 위해 실제의 어머니를 자주 끌어들일 것이다. 이때 그의 시는 혁명과 하나가 되고 죽음과 하나가 될 것이나, 그 혁명과 죽음의 자리에 어머니는 늘 찾아들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덜 성급한 아들이라면,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세상의 균열을 끌어 안을 수 있을 것이다. 시는 그때 더러움으로 더러움을 씻는 복낙원의 서사가 될 것이며, 하다 못해 사랑과 깨달음이 넘치는 지혜의 말이라도 될 것이다.

이장희에게라면 이런 식의 분류가 부질없다. 그에게 어머니는 죽은 어머니이거나 계모이다. 계모의 낙원은 애초부터 황폐한 낙원이다. 습기 없는 이 낙원에서는 모든 물질이 그 물질성으로만 곤두설 것이다. 손상될 에로스도, 그 손상을 염려하여 봉쇄해야 할 에로스도 거기에서는 처음부터 움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모보다 더 포악한 것은 죽은 어머니이며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이다. 시간의 길이 아닌 이 어머니는 과거의 순결이 미래의 성장과 실천으로 이어질 방도를 알려주지 않는다. 죽은 어머니도 종종 시인을 찾아 올 것이나 사랑해야 할 것이건 증오해야 할 것이건 세상의 소식과 함께 오지 않는다. 죽은 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아들에게 등을 돌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끌어안을 때 어머니는 아들의 눈에 세상을 가리고, 등을 돌릴 때 어머니는 시인과 세상 사이에 뛰어넘을 없는 거리를 만든다. 시인은 어머니의 마지막 손길이 닿았던 그 순간의 소년으로 거기 남는다. 소년으로서의 시인은 순결하나 그 순결성은 깊어지거나 넓어지지 않으며, 시가 될 말들은 어떤 마비증에 의해 가로막힌다. 그 순결한 낙원에는 오직 허무의 젖가슴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젖가슴에 무심한 식욕을 느끼는 한 소년의 애구가 산하는 있어도 나라는 없는 식민지적 삶의 알레고리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머니에게 버림 받은 아이이며, 어버지가 포기한 아들이며, 수습해 줄 조국이 없었던 이 젊은 시인은 세상살이를 더 이상 미뤄 둘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복스러운 乳房>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결단으로 맞은 죽음의 순간은 이 허무의 젖가슴마저 박탈된 순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黎明>, 1925년 9월호. 諸海萬 편, 『李章熙 全集 - 봄과 고양이』 (문장사, 1982)에서 인용한 후 현대의 철자법에 따라 띄어썼다.

2) 같은 책, p.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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