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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국화 옆에서>, 이런 해석 어떠세요?
*이 글은 [창비무명인]이라고만 밝힌 분이 '창비게시판'에 <국화꽃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9회(2001년 6월 26일~7월3일)에 걸쳐 올린 글을 퍼온 것입니다. 미당 서정주의 <국화옆에서>의 다양한 읽기의 한 증거로서 여기에 옮겨둡니다. 읽기 전에 <국화 옆에서> 시 전문을 먼저 올립니다.
*이 글 뒤편에 이 글과 관련된 백낙청교수의 글과, 동아일보 기사도 함께 올려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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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옆에서
서 정 주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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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의 비밀1: 금기로서의 [국화꽃]과 [거울]
미당 서정주의 대표시 [국화 옆에서]는 국민적 사랑을 받아 온 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를 암송할 정도로 사랑해 왔고, 또 지금도 대부분의 시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신세대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또한 이 시는, 미당의 수치스런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국정교과서에 수록되었었고 지금도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리고 있을 정도로 좋은 시의 본보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미당이 시의 제3연에서 국화꽃을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국화꽃을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걸어 온 후 관조의 경지에 다다른 중년 여인을 비유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어느 신문 기자의 다음 말은 [국화 옆에서]가 그 동안 어떻게 우리 나라에서 읽히고 있었는 지를 잘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우리는 중·고교 국어시간에 「국화 옆에서」를 ‘모든 풍상을 겪고 인품이 완성된 경지에 이른 40대 누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배웠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으며 실제 미당 자신도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경향신문 2000-06-29).
하지만 [국화 옆에서]는 기존의 이러한 원론적 해석이 모범답안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그 상징성이 단순한 시는 아닙니다. 미당이 시 속에서 "국화꽃=누님"이란 은유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고, 또 외견상 시의 의미구조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해 보여도, 이 시는 심층에 간과하기 힘든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 문제점은 대충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데, 우선 오늘은 한 가지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국화 옆에서]가 보여주는 첫번째 문제점은 3연에 등장하는 거울과 그 국화꽃이 노오란 꽃잎을 지닌 황국(黃菊)이란 점입니다. 무릇 문학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 상징은 그 의미가 다각도로 검토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국화 옆에서]읽기는 이 시에 등장하는 상징물인 황국과 거울을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거의 대부분의 평론가들의 [국화 옆에서 읽기]가 "황국=친근한 누님," "거울=관조의 경지"로 등식화 시켜서 비유적으로만 해석했지, 상징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칼 융의 용어를 빌린다면, 기존의 평론가들은 국화꽃과 거울을 표지적(semiotic)으로만 이해했지, 상징적(symbolic)으로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참고자료"satgatlim님께: 융의 상징론에 관한 답변"(click)).
우선 국화꽃의 상징성에 대해서 설명드리기 전에 그림을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왼편의 그림은 일본천황의 휘장이고, 오른편의 그림은 신궁에서 "20세기 일본의 신주(神主)가 신토(神道)의 신 태양을 상징하는 거울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칼 G. 융, {인간과 상징}, 열린책들, 22쪽).
특히 일제 강점기라는 치욕스런 역사를 살아 온 우리 국민에게 있어서 국화꽃과 거울은 신중한 고찰이 필요한 상징물입니다. 왜냐하면 황국(黃菊)은 일본에서 지난 14세기 이후로 일왕과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었고, [고사기]를 보면 거울은 일왕이 현인신(現人神)의 위상을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상징물이기 때문입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란 책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국화는 칼과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를 표상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황국은 황실의 문장(紋章)으로서 황실가족의 모든 휘장을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형태--일왕의 예복, 일본국가훈장, 일본우표,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무기 등등--로 일본 제국주의 문화와 삶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 Japanese Royalty Flags. by Phil Nelson. 2000-09-09 (click))
서구에서 발간되는 각종 세계 상징 사전을 살펴보아도, 국화꽃은 일차적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꽃이며 일본황실 내지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소개되고 있다. 프랑스의 {상징 사전}은 국화꽃의 상징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국화의 꽃잎이 질서정연한 배열로 퍼져나가는 방식으로 인해 이 꽃은 본질적으로 태양의 상징이 되며, 따라서 장수(長壽)와 불멸(不滅)을 뜻한다. 국화꽃이 일본 황실의 문장(紋章)이 된 이유도 그러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16개의 꽃잎을 지닌 국화꽃으로 된 일본 문장(紋章)엔 태양의 이미지와 나침반 지침면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는 데, 그 중심에서 천황이 세상을 통치하고, 우주의 모든 방향을 집약한다" Jean Chevalier & Alain Gheerbrant,, Dictionnarie des symboles (paris: Robert Laffont, 1982) 247쪽.
일본 문화에서, 국화꽃이 태양신과 일왕의 상징물로 해석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울도 태양의 상징물로 해석됩니다. 보편적 문화상징으로서 '거울'이란 기표(signfier)는 여러 상징적 기의 (signfied)--통치자, 부부애, 자기성찰, 달, 태양, 진실, 자기애 등등--를 지닌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일본 문화 속에서의 거울은 천손강림시에 태양신이 자신의 혼(魂)을 담아 하사한 신기(神器)로 전해지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태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은 삼종신기(三種の神器)의 하나로 이세신궁에 모셔지고 있고, 또 일제 강점기엔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을 주신(主神)으로 삼는 조선신궁에도 거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근 50년이 넘도록 국화꽃과 거울이 지니는 이러한 문화적 상징성은 단 한번도 우리 문학작품의 해석에 있어서 고려의 대상이 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문학판에선 국화꽃과 거울을 일본문화와 연계지어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스러울 정도로 금기시 되어 왔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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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의 비밀2: 일본문화제국주의의 공략
어제의 제 글에 댓글을 달아주신 네티즌들께 감사드립니다. 김흥년님의 조언은 저를 배려해서 해주신 유익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쇼쇼쇼님의 따스하신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옥문수님의 냉소엔 좀 섭섭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관심의 표시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쓰는 글엔 참고자료소개가 좀 많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 가방끈이 길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학자들과 작가들의 표절이 난무하는 이 땅에서 게시판에 올리는 글이라도 참고문헌을 되도록 정확히 명시함으로써 남의 지적 재산권을 침범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티즌들께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학술적 글쓰기라는 것이, 작문(composition)의 어원이 '짜집기'(put together)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남의 글로 레고 장난감으로 집짓기 하듯 결합시키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그 '짜집기' 과정에서 내 것과 남의 것의 차이는 제대로 밝히는 관행이 이 땅에도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마태 22: 20-21)"
그럼, 일단 김흥년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과연 "미당이 일본 문화권에서의 국화꽃과 거울의 상징적 의미를 알고 그 시를 썼는 가?"를 실증적으로 증명하든지 아니면 개연성있게 풀어 나가든지 해야 할 의무가 제게는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제 논문은 실패한 논문이 되겠지요. 하지만, 제 논문의 성패 여부와는 상관없이, 저는 나름대로 제 논문이 하나의 문제제기로서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번째 이유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에게는 너무도 뼈아픈 상징일 수 있는 황국(黃菊)의 상징적 의미가 우리 국민 및 꿈나무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국화 옆에서]는 아직까지 우리나라 고교 문학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한 때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황국(黃菊)을 "성숙한 누님같은 꽃"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듭니다. 또 제가 친지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유서깊은 광주 모(某) 고교에서 처음 교기와 배지를 만들 때 그 제작을 일본에 주문했었는 데, 일본인들이 교기에 음흉스럽게도 국화꽃 문양을 넣었다고 합니다. 제가 인터넷으로 그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까 아직 그 교기와 배지가 바뀐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꿈나무들의 주체성확립을 위해서도 교육현장에서 국화꽃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광고 기법의 하나로 잠재의식적 광고 (subliminal advertising)라는 것이 있지요. 영화 필름의 한 컷에 "콜라를 마셔라"라는 문구를 새겨 넣을 경우, 사람들은 나중에 음료를 사 마실 때 콜라를 잠재의식적으로 선택하게 되지요(각주1). 영화 필름 속의 한 컷도 그런 무서운 효과를 지니는 데, 암송할 정도의 애송시가 지닌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따라서는, 저는 아이들이 황국(黃菊)을 보고 서정주의 시만 떠올릴 것이 아니고, 그 끔찍스런 일본 황실의 휘장도 함께 떠올리길 바랍니다.
2) 두번째 이유는, 이 시가 자랑스럽게 외국어로 번역되어 서구에 소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여러 세계 상징사전을 찾아보면, 거의 어김없이 "황국(黃菊)은 일본제국주의의 꽃"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국화꽃은 서구인들에게는 그렇게 다의적인 뜻을 가진 꽃이 아닙니다. 서구인들에게 국화꽃은 '일본황실의 꽃'과 '묘지의 꽃'을 의미할 따름입니다. netscape와 같은 인터넷 영어 검색엔진에서 "chrysanthemum" 내지 "chrysanthemum throne"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시면, 많은 자료들이 뜹니다. 또 서구인들은 일본천황제도를 한결같이 "국화 제위(菊花帝位)"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즉, 서구인들의 머리 속에 "황국=일본천황"이라는 등식이 꽉 박혀있는 데, 일본 강점기의 악몽을 치룬 우리나라에서 "황국=누님"이란 비유를 사용한 시를 좋은 시로 외국에 자랑스럽게 소개한다면, 서구인이나 일본인 눈에 우리 민족은 너무 배알이 없는 웃기는 족속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엔 미당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두 세편의 수필에서 서구인들이 <국화 옆에서>를 이해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시의 암시]란 수필에서 그는 "내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보이고 있는 그러한 고고 청순한 지조 같은 건 그런 빠리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느낌의 습관을 통해서는 전달이 잘 안된다 하는 게 알려진 셈이지요"(292)라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인들이 독일정부에 협력한 자국인들을 어떻게 혹독하게 단죄했는지를 상기한다면, 그들이 우리 민족이 황국을 예찬하는 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닐까요?
3) 우리가 국화꽃의 상징성에 관심을 지녀야 될 마지막 이유는, 아직까지 이 땅에서 일본의 제국주의가 사라지지 않은 채, 문화의 옷을 입고, 우리 청소년들의 문화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성세대는 이 땅의 아이들이 보고 있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일본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깊게 스며들어 있는 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이 좋아하는 만화영화 {세일러 문}에는 일본 제국주의 및 신도의 상징물인 삼종신기(三種の神器)--쿠사나기의 검,야타의 거울, 야사카니의 곡옥--가 주인공의 마법적 장신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각주2, 각주3). 또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인기있는 마모루 나가노의 공상과학만화 <다섯 별 이야기(The Five Star Stories)>의 주인공의 이름은 아예 일본 천황의 수호신인 태양신 아마테라스입니다. 그는 미래의 우주왕국(태양성단)을 수 천년 동안 다스릴 불사불멸의 제왕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일본만화 속의 주인공 아마테라스는 흰색의 황제복을 입고, 목에는 곡옥 목걸이를 하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으며, 머리에는 노오란 국화꽃을 꽂고 있습니다(각주4). 이렇게 일본의 문화적 제국주의가 우리 청소년들의 내면을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음험하게 공략해 들어오고 있는 데, 우리는 아직도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문학교과서에 실어, 좋은 시의 본보기로 가르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문학 교사들이, 일본 문화의 제국주의적 공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는 못할 말정, 황국(黃菊)을 '관조의 경지에 이른 친근한 누님'의 비유로만 가르친다면 이는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국화 옆에서>의 시인에게 추서되어야 할 상은 국화문양이 새겨진 일본의 일등공로훈장이지 우리 민족의 금관문화훈장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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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에 인용된 인터넷 사이트
주1: http://user.chollian.net/%7Ekdh1212/ad-room/1-100/subliminal_ad.html [잠재의식적 광고]
주2: http://myhome.dreamx.net/krissh/kof/senario02.htm [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에 관하여]
주3: http://web.mit.edu/philip/www/sailormoon/3rdweek.pdf [Japanese Culture: Sword, Mirror, Jewel]
주4: http://chunma.yeungnam.ac.kr/~j6221273/ [화이브 스타 스토리즈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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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의 비밀3: 기존의 읽기의 여러 문제점
제 미발표 논문에서는 각주1에 실명과 더불어 언급한 사항입니다만,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미리 밝혀야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제가 <국화 옆에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읽게 된 데에는, 제가 사부(師父)님으로 모시고 있는 어떤 교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문화권력 및 매문(賣文)과는 거리가 먼 '순수학자'이시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일제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니시고 일본어에 능통하신 사부님은 제게 3가지 사항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국화꽃은 일본황실의 문장(紋章)이다. 2) 미당은 <국화 옆에서>를 쓸 무렵, <마쓰이 히데오 송가>를 썼다. 3) "국화꽃=누님"은 한국인의 일반적 정서에는 부합되지 않는, 뭔가 수상쩍은 구석이 있는 이미지이다. 그러한 그 교수님의 견해를 참고 삼아 자료조사를 시작했습니다만, 2)의 경우엔 실증적 자료를 찾기가 힘들어서 제 논문에 반영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사부님과 나눈 대화를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기존의 <국화 옆에서>읽기가 보여주는 두번째 문제점으로 국문학자나 평론가들의 비평적 관심의 부재를 들고 싶습니다. <국화 옆에서>를 정답이 너무도 뻔한 쉬운 시, 대중적인 취향에 맞는, 격이 떨어지는 시라고 생각한 탓인지는 몰라도, 학자나 평론가들은 이 시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각주1). 제 생각엔, <국화 옆에서>를 가장 세밀하게 텍스트 중심으로 분석한 평자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창작자인 미당 자신인 것 같습니다. 미당은 1949년 조지훈, 박목월과 공저한 <시창작법>이란 책에서 자신이 <국화 옆에서>를 어떻게 창작했는 지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미당은 국화에 관한 여러 편의 수필과 <시의 암시>등과 같은 시론에서 <국화 옆에서>를 전문(全文) 소개하면서 창작 배경 및 시어의 상징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미당이 <국화 옆에서>에 이토록 많은 애착을 지닌 것은 그가 이 시를 그만큼 공들여 썼을 뿐만 아니라 그 심층에 다른 많은 암시와 복선을 깔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미당이 그의 시론에서 시의 가장 중요한 특성 내지 구성으로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소량(小量)으로 정선(精選)해 가지는 언어의 그늘에 함축해 지니는 바의 무진(無盡)한 암시력(暗示力)" 내지 "언외(言外)의 암시력(暗示力)의 효과적 구성"이기 때문이다 (각주2).
<국화 옆에서>를 새로운 각도에서 읽어야 하는 세번째 이유로, 시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의 배합이 보이는 비상식성과 반전통성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선, 시어들--소쩍새, 천둥, 먹구름, 거울, 누님, 국화꽃, 무서리--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들 사이에 부조화와 충돌이 느껴집니다. '누님'의 이미지는 친연성과 평범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누님'의 이미지를 보조하고 보강하는 다른 이미지들이 지나치게 강렬하고 비극적이고 음울합니다. 누님같은 꽃의 탄생을 노래하기 위해, 죽음과 여인의 한(恨)을 연상시키는 불길한 소쩍새와 무서리를 언급하고, 천둥까지 동원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과장이 심하다고 밖에는 달리 말하기 힘듭니다. 그래서인지 고급한(?) 취향을 가진 문학 평론가들은 이 시를 심도있게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국문학자들의 시 해설 가운데 제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흥규교수와 이어령교수의 견해입니다. 물론 두 분의 해설도 심도있는 고찰은 아니었습니다.
그[미당]의 생각으로는 봄에 처절하게 우는 소쩍새, 여름의 천둥, 그리고 가을 밤 무서리와 그 자신의 잠 못 이룸이 모두 한송이 국화꽃과 어떤 신비스러운 인연을 가진 것만 같다. 그러나 상식적 논리를 넘어 생각해 볼 때 이 우주와 생명의 신비란 얼마나 깊은 것인가? 더욱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어떤 인연에 따라 생긴 것이라는 불교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나 비논리가 아닐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주적 인연의 가능성 위에서 한 송이 꽃의 피어남을 그 앞에 있었던 수많은 괴로움과 시련의 결과로 여기는 상상력이다 (각주3)
하지만 비상식적인 이미지 구성의 숨겨진 의미를 설득력있게 구체적으로 설명함이 없이, 불교의 인연설 내지 윤회설로 설명하거나 생명 탄생의 장엄한 신비를 노래한 것으로 확대 해석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불교적 관점을 도입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왜 하필이면, 그 많은 봄의 이미지 가운데 소쩍새인가? 왜 하필이면 그 많은 여름의 이미지들 가운데 천둥인가? 왜 하필이면, 그 많은 가을의 이미지들 가운데 무서리인가? 과연 이 시를 어느 무명씨가 썼더라도, 김흥규교수가 그렇게 심오한 의미를 담아 해석하였을 지 의구심이 듭니다.
미당의 국화꽃의 이미지가 지니는 반전통성에 대해선 이어령교수와 박광용교수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많은 학자들은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을 한국 전통의 문학적 맥락과 연계시켜 해석했습니다만, 이어령교수와 박광용교수는 이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 두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국화꽃의 전통적인 한국적 이미지는, 조선 중기의 학자 이정보(李鼎輔)의 시조--"국화(菊花)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三月東風) 다 보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는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매한 인품을 지닌 절개있는 선비라는 남성적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이교수와 박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미당의 국화꽃은 여성적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에 한국문화상징으로서의 전통적 "국화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박광용교수의 해석은 내일 상술할 생각이기 때문에 여기에선 생략하겠습니다). 박광용교수는 [<국화 옆에서>와 이승만,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에 대한 예찬’], <씨알의 소리, 2000년 5. 6월호>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또 이어령교수도 미당의 국화꽃의 독특성 내지 새로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각주4).
만약 시인 서정주(徐廷柱)의 [국화(菊花) 옆에서]가 은둔을 노래한 도연명이나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예찬한 이정보의 국화였다면 우리는 이 시를 읽지도 기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당(未堂)의 [국화옆에서]를 읽는다는 것은 곧 국화를 노래한 다른 텍스트와의 차이를 읽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이 국화를 [누님]에 비유한 바로 그 은유이다. 봄에 피는 봉숭아가 여성적인 것이었다면, 국화는 지금까지 남성 그것도 고결한 사대부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미당은 그것을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국화의 성(性;젠다)을 바꿔 버렸다. [군자=국화]가 [누님=국화]로 패러다임을 바꿀 때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이어령교수가 말하는 "그 두가지 다른 느낌"의 첫 번째 특성은 "관념적인 이념의 남성 원리가 감각적인 미(美)의 애정의 여성 원리로" 바뀌게 됨으로써, 기존의 "'먼 남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은일자(隱逸者)'혹은 '책 앞에 앉은 선비'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또 이교수가 말하는 두 번째 특성은 "그냥 누이가 아니라 [나의] 누님이라고 했듯이 매우 가까운 개별성과 혈연성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즉, 한국문학 속의 국화꽃이 고고하고 이념적인 존재를 상징하면서 "주위로부터 단절된 배제적 가치"로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당의 국화꽃은 "주위의 모든 것과 친연(親緣)관련을 이루며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당의 국화꽃이 한국고전문학 속의 국화꽃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본 이교수와 박교수의 견해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시 전반에 걸친 그들의 해석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박교수는 나름대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원인을 고찰하고 있습니다만, "국화꽃=이승만"이라는 등식만을 고집함으로써 자가당착적인 일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어령교수의 해설은 미당의 시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본질적인 질문들--'왜 미당이 하필이면 국화꽃의 탄생을 묘사하기 위해 소쩍새, 천둥, 거울, 무서리와 같은 이질적인 시어들을 선택했을까?' '미당의 국화꽃이 그 패러다임을 바꾸게 된 원인 및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미당이 국화꽃의 젠더를 바꾼 것은 그의 독창적 발상인가?' 등등--에 대해선 구체적인 답을 모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펼쳐 나갈 글에서 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모색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국화 옆에서>읽기가 보여 주는 문제점으로 신화적 해석의 부재를 들고 싶습니다. 고대 신화와 전설은 미당의 후기 시 뿐만 아니라, 시 창작 전반에 걸쳐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사>나 <귀촉도>등과 같은 초기 시에서도 살펴 볼 수 있듯이, 미당은 서양과 동양의 여러 신화와 전설에서 소재를 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미당은 외국과 한국의 신화 내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여신과 여걸--이브, 클레오파트라, 헬레네, 선덕여왕, 성모 마리아,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 황진이, 웅녀, 세오녀 등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 미당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天照大神)와 어머니 이자나미 (伊耶那美命)에 관한 창세신화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서른 살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일본어를 '국어'로 여기며 살아왔고, 일장기를 아랫목에 세워두고 합장까지 할 정도로 신성하게 생각했으며,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에게 신사참배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각주5). 하지만 일본신화 내지 문화와 연계지어 미당을 해석하는 것은 기존의 학문적 논의에서는 배제되어 왔습니다.
기존의 [국화 옆에서] 읽기가 보여주는 이러한 문제점 내지 한계성은, 이 시를 새로운 각도에서 심층적으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국문학자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소홀히 취급해 온 상술한 문제점들은 미당의 미학과 세계관을 보다 정당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국화 옆에서>가 아직도 국민적 애송시로 사랑받고 있는 데다 문학교과서에 실리고 있는 만큼,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내일부터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할 이 글의 본문에서는「국화 옆에서」에 있어서의 국화꽃의 상징성과 일본신화와의 유사성을 역사사회학적인 측면과 텍스트 내재적 측면에서 상세히 고찰하고자 합니다.
내일은 제가 생각하는 국화꽃의 상징성에 대해서 우선 간략히 언급하고, "국화꽃=이승만"으로 본 박광용교수의 견해를 간추려 소개하겠습니다. 박광용교수의 글은 작년 여름 발표되어 논쟁의 불씨를 피웠습니다만, 국문학자들의 폄하(貶下)로 한국3대 언론과 방송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겐 그 분의 견해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각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미당의 시에 관한 대표적 비평문 모음집--- {서정주} (서강대학교출판부, 1998), {미당연구} (민음사, 1994), {서정주연구} (동화출판공사, 1975)-- 및 국문학자들의 미당 연구서를 살펴보아도, 국화꽃을 원론적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게 해석한 글을 발견하기 힘들었습니다.
2) [시작과정], [시의 암시력], {서정주문학전집2} (일지사, 1972) 47쪽과 57쪽.
3) 김흥규저,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한국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 한샘, 1995, 148쪽
4) 이어령교수의 글은 인쇄물로는 그 출처를 찾기가 힘들어서 인터넷 사이트 http://dep.jnc.ac.kr/parkhs/index.htm의 문학자료실에 올려진 것을 참조하였음.
5) 김병걸·김규동 편, [서정주 (達城靜雄)],{친일문학작품선집2} (실천문학사, 1986) 271-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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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의 비밀3>에 덧붙여서 쓴 글과 시 전문(全文)소개
제가 오늘 올린 글의 분량(원고지 30매)이 많기 때문에, 혹시나 네티즌들께서 끝까지 찬찬히 읽지 않으실까 우려되어서 부연 설명 드립니다. 저는 제 논문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종천순일(從天順日)의 상징, '노오란' 국화>를 고통과 불면에 시달리며 썼습니다. 어떤 때는 제가 서정주 귀신에 들려있는 것이나 아닌지 제 자신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밤낮으로 미당에 관해서 생각했습니다. 제가 마땅히 논문을 기고할 만한 지면을 두루 찾아보기도 전에, 이렇게 서둘러서 인터넷상으로 발표하는 것은, 강박증처럼 저를 괴롭혀 온 '미당 할아범 귀신'으로부터 풀려나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국화 옆에서]를 쓰면서 강박증 비슷한 것에 시달린 것은 이 단순한 표피를 지닌 시가 심층에서 보이는 여러 미스테리한 요소들 때문입니다. 그 미스테리한 요소들을 간추려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언제 이 시가 창작되었을까? 왜 발표 시점을 미룬 것일까?
이 시의 창작시점에 대해서 미당은 좀 횡설수설하고 있습니다.
어느 수필에선 하루만에 썼다고 하고, 2-3년 생각해서 쓴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그 시의 완성 시점을 1947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이라고도 말합니다. 제 사부님의 '해방 이전 창작설'도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미로 그 자체죠.
2) 미당은 왜 평론가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국화 옆에서]에 그렇게 오랫동안 애착을 지녔던 것일까?
3) 만약에 미당이 이 시를 해방 이후에 썼다면, 어떻게 거울과 황국(黃菊)이라는 일본적 상징물을 그대로 뻔뻔스럽게 활용했을까? 실증적 자료는 없지만, 만약 미당이 사부님 말씀처럼 해방 이전에 이 시를 썼다면, 천황을 '내 누님'이라 부른 당돌함의 근거는 무엇이고, '무서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사부님 말씀처럼, 과연 천황을 누님이라 칭했기 때문에 검열에 걸릴까봐 두려워서 발표를 미룬 것일까?
4) 그 많고 많은 봄과 여름의 이미지 가운데 왜 하필이면 소쩍새의 울음과 천둥의 울음을 택해서 "누님같은 꽃"의 탄생을 서술했을까?
5) 왜 한국고전문학 속의 "국화꽃=선비"의 남성적 패러다임을 미당은 "국화꽃=내 누님"의 여성적 패러다임으로 바꾸었을까? 과연 그 만의 독창적 발상일까?
6) 왜 학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성장한 미당의 시들을 일본문화와 연계시켜 읽을려는 시도를 그동안 하지 않은 것일까? 지난 50년 간의 우리의 학문적 풍토라는 것이 일본의 문화적 상징과 신화들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 할 정도로 폐쇄적이었던 말인가?
제 논문은 이러한 미스테리한 요소들을, 실증적 자료를 토대로, 제 미천한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추적해보고자 한 시도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답을 내리긴 하였습니다만, 여전히 미제(未濟)로 남길 수 밖에 없는 '불확정성의 빈 틈'(gaps of indeterminacy)은 남아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제공하는 여러 자료들을 참고 삼아 네티즌들께서는 한 번 나름대로 퍼즐을 맞추듯이 그림을 짜 맞추시길 바랍니다. 저는 결코 네티즌님들께 모범답안을 제시할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제가 이 논문을 쓰면서 새로이 깨닫게 된 것은, '학술적 글쓰기' 내지 '비평적 글쓰기'가 '소설적 글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만약 소설가였으면, 아마도 "국화꽃의 비밀을 찾아서"란 소설을 썼겠지요?
부디 제 논문이 다소 건조하고, 지루하고, 때론 [무당판수놀음]처럼 느껴지실 지라도, 부디 '미당 서정주'라는 우리 민족의 '딜레마' 내지 '야누스(Janus)'에 대해 모두 함께 고민해 본다는 취지로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펌/2001년 6월 26일. 창비 자유게시판> ----------
국화꽃의 비밀4: 국화꽃은 이승만일까?
제 논문의 본론은 크게 두개의 장---역사사회학적 측면의 분석과 텍스트 내재적 측면의 분석--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역사사회학적 측면에서의 분석은 제가 구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를 참고로 해서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사부님이 말씀하신 '해방 이전 창작설'은 일단 실증적 자료를 찾기 힘든 관계로 역사적 고찰에서는 제외시켰습니다. 만약에, 제 사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미당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마쓰이 히데오 송가>를 발표한 1944년 11월 무렵에 <국화 옆에서>를 쓴 것이 확실하다는 고증적 자료만 있다면, 제 글은 수정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고증적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감스럽지만 저는 일단 미당의 횡설수설하는 회고담을 중심으로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 대해서 조사했습니다. 실증적 자료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역사적 고찰을 할 경우, 잘못하면 그야말로 '무당판수놀음'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미당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하려는 의도보다는 미당이라는 야누스적 인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고찰해보자는 의도에서 글을 쓴 것입니다. 저는 비록 미당의 추악스런 삶을 혐오하지만, 예술가로서의 미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의 시집과 시론을 성실하게 읽었습니다. 도대체 유종호교수나 김화영교수 같은 원로 비평가가 미당이 작고했을 때, 그의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미당을 극찬했는 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1
: 박광용 교수의 글과 발표 당시의 국내상황
제 논문의 본론의 첫번째 장에 해당되는, <국화 옆에서>에 대한 역사사회학적인 고찰의 경우, 박광용교수가 <[국화 옆에서]와 이승만,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에 대한 예찬'>이란 글에서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고 있는 만큼, 그의 견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제가 박광용교수의 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국화꽃=이승만"으로 본 그의 견해를 지지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서정주의 국화꽃을 어떤 특정 개체나 인물을 상징한다고 보기보다는 좀 더 초월적인 존재, 즉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인 삶을 살다 간 미당이 섬긴 '하늘'과 '태양'과 같은 존재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제 생각에 미당은, 일제시대에 히로히토왕과 아마테라스를 하늘과 태양으로 생각하고 섬겼듯이, 해방 후에도 여러 다른 '하늘'(天)과 '태양'(日)--이승만, 전두환, 단군, 웅녀, 세오녀, 선덕여왕 등등--을 섬기고 따랐던 것 같습니다. 미당이 섬기는 이 초월적 존재는, 종이 섬기는 주인, 백성이 섬기는 주군에 비유될 수 있으며, 미당은 주어진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 그에게 하늘과 태양이 되어줄 수 있는 인물의 이데올로기에 맞추어서 살았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가 섬긴 일군(一群)의 주군(主君)들의 정점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박광용교수가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을 이승만으로 본 것은 이 시가 발표될 당시--1947년 11월 9일자 경향신문--의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박광용교수가“가을에 피는 국화꽃은 외국에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나이든 독립투사"인 이승만을 상징한다고 해석한 것에 대해, 이남호 교수는 "<국화 옆에서>는 미당의 수많은 명시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시에 나오는 국화를 이승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시를 전혀 모르는 자의 무식한 소리이므로 반박할 가치도 없다. ‘국화 옆에서’에 표현된 우리말의 아름다움, 삶에 대한 성숙한 통찰과 의젓한 태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해석을 할 수가 없다”라고 일축하였습니다 (경향신문 2000-07-10).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국문학자가 보인 이러한 고압적인 태도 때문인지는 몰라도, 박광용교수의 새로운 해석은 작년 여름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긴 했어도, 중앙 매스컴과 문단의 주목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습니다(제가 이 논문을 쓰면서 자료조사를 열심히 하고 미당의 시론과 자서전등을 찾아 읽은 것도, 저의 글이 박교수의 글처럼 문화권력적 평론가들의 희생양이 되어,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불운한 운명을 맞이할까 두려워서였습니다). 하지만, 박광용교수의 글은 시를 주로 텍스트 외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역사적 사실을 다소 자의적으로 해석한 문제점이 있긴 해도, “시를 전혀 모르는 자의 무식한 소리이므로 반박할 가치도 없다”고 혹평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형편없는 글은 아닙니다. 오히려 박광용교수의 글은 기존의 문학연구가들이 그 동안 소홀히 다루어 온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새삼 환기시킴으로써 이 시를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폭넓게 해석할 수 있도록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박광용교수가 국화꽃을 이승만으로 본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그는 미당의 국화꽃의 이미지가 도연명이나 이정보의 국화꽃의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한국과 중국의 전통문화 속에서, 국화꽃은 “‘높은 뜻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면서 살아가는 은자(隱者),’ 곧 한 사람의 서민으로 살아가는 뜻 높은 선비”를 상징하는 반면에, 일본문화 속에서 국화꽃은 황실을 상징하는 고귀한 꽃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51쪽). 하지만 박광용교수는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이 일왕을 상징한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위상이 일왕과 다름없었던 이승만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어떠했는 지는, <조선조설사>를 쓴 국문학자 김태준이 「단군론」에서 “국수주의적 역사 등이 천조대신(天照大神) 대신에 단군(檀君)을 가르치고, 왜왕(倭天皇) 대신에 이승만을 우상화하고 있으며 . . . “라고 경고한 사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박교수의 글 55쪽에서 간접인용). 즉 해방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천조대신' 대신에 '단군'을, '일왕' 대신에 '이승만'을 숭배했는 데, 그러한 외견상의 민족주의적 경향이 냉철한 역사의식과 자기성찰이 결여된, 당대의 시대상황에 순응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미당의 경우,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성향은 농후했습니다. 미당은 [내가 본 이승만 박사]라는 글에서, 이승만을 대면하기 전에, "적어도 하늘의 庶子 桓雄의 아드님--檀君 비슷한 모습에, 그렇지, 적어도 그리이스의 神들의 우두머리--제우스만큼은 천둥소리 나게 하는 눈살과 이맛살에. . ."를 상상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각주1). 일왕과 천조대신을 섬겼던 미당이 어느 사이에 민족주의자가 되어서 이승만을 상상하며 환웅과 단군을 떠올리게 되었을까요?(부연설명 드리자면, 흔히 평자들이 <신라초>와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및 다른 많은 수필에서 미당이 삼국유사 내지 삼국사기를 소재로 삼아 "단군," "웅녀," "세오녀," "파소" 등등을 형상화한 것을 갖고 민족정신 운운하는 데, 그것이 진정한 민족사랑에서 출발한 것인지에 대해선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민족주의의 옷을 입은 친일의 또 다른 변이가 아닌지 살펴 보아야지요. 또 저는 <질마재 신화>에 나타난 미당의 독특한 신(神)의 개념이 지닌 독자성과 민중성이 일본의 신(神, 가미)의 개념과 많이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직관(?)을 입증하기 위해선 많은 자료를 토대로 설득력있는 글을 써야 되겠지만요.)
박광용교수가 국화꽃을 이승만의 상징으로 본 구체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서정주가 그 당시 이승만의 전기를 집필했었다는 점입니다. 박광용교수는 1947년 여름부터 이승만의 집에 드나들면서 미당이 전기를 집필했었다는 사실과 그가 나중에 쓴 수필 <이승만 박사의 곁>(<서정주 문학전집>3)에서 회고한 내용에 주목합니다. 미당은 “그(이승만)와의 반 해쯤의 접촉은 내게 은근히 큰 힘이 되었다. 늘 짓눌리면서도 끈질기게 뚫고 나오는 민족혼의 상징을 그에게서 가까이 느끼고, 일정 말기 한 때의 엉터리였던 내 오판을 대조해 보고, 다시 살 마련과 용기를 내 속에 일으키는 데에 아주 큰 힘이 되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는 데, 박광용교수는 이러한 이승만의 이미지가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의 이미지와 동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각주1). 박광용교수가 국화꽃을 이승만의 상징으로 본 또 다른 이유는, 시 제목이 이승만과 연관되어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광용교수는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이 이승만을 상징하기 때문에, 시인이 <국화를 먹으면서> 내지 <국화와 말하면서>라는 제목 대신에 친근하게 우러러 보이는 <국화 옆에서>란 제목을 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승만을 회고하는 수필의 제목이 시 제목과 유사하게 <이승만 박사의 곁>이라고 붙여진 것도 "국화꽃=이승만"이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박광용교수의 지적이 일리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시의 창작 시기와 시어의 해석에 있어서 자의성이 짙습니다. 우선 미당은 국화를 소재로 쓴 수필 <국화III>에서, "1946년 해방 이듬해의 가을 어느 날 밤 잠이 잘 안오던 끝에 나는 뜰에 피어있는 국화꽃들을 생각하며, <국화 옆에서>라는 한 편의 시를 썼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각주2). 이 회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국화 옆에서>의 창작 시점은 발표된 시점인 1947년 11월보다 일년 남짓이나 앞선 것이 됩니다. 즉 <국화 옆에서>는 이승만을 만나서 전기를 집필하기 시작한 시점인 1947년 7월 보다 훨씬 오래 전에 씌여 진 것이 됩니다. 따라서, 「국화 옆에서」의 국화를 이승만으로 단정하기보다는 그 이전에 모델이 된 또 다른 인물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해석이 될 것입니다. <국화 옆에서>를 1946년 가을에 쓰게끔 만든 인물 내지 사건이 있었을 것이고, 여러 사유로 인해 발표 시점을 미루다가, 이승만을 만난 이후에 다소의 수정을 거쳐서 발표되었을 개연성이 큽니다. 따라서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은 창작의 초기에 모델이 된 어느 인물의 이미지와 이승만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박광용교수는 창작시기와 발표시기의 편차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발표 시점만을 중시해서 국화꽃을 일관되게 이승만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박광용교수의 "국화꽃=이승만"이라는 등식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또 다른 이유는, 미당의 국화꽃이 지니는 여성적 이미지의 독특성을 인지했으면서도 이 여성적 이미지가 이승만과 어떻게 부합될 수 있는 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박광용교수는 미당의 국화꽃의 이미지가 일본문학 속의 여성의 이미지와 흡사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일본 최고 수준에 드는 단편소설로 인정받는 하야시 후미코(1903-1951)의 [철 늦은 국화]는 1948년에 발표되었는 데, 여기서도 고난의 세월을 겪은 55세라는 나이로 해서 '대단한 분별력을 가진 . .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는 단아한 표정'의 여인을 국화로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마치 ‘거울 앞에선 누님’과 같이"(51-52). 하지만 여기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미당의 시는 1947년에 발표되었는 데, 후미코의 소설은 1948년에 발표되었다는 점입니다. 1947년 이전에도, 후미코의 소설처럼, 일본문학 속에서 국화꽃이 여성적 이미지를 지닌 상징으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는 지를 알아야, 미당이 일본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국화꽃=누님"이라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을텐데, 박교수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교수가 "이승만=국화꽃 누님"이란 등식을 형성한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국화꽃의 특징:
1) 오랜 세월의 여정을 거치면서 잘 손질되어 고귀하게 우러러 보이는 품성을 지닌 꽃
2) 명치유신 이후에는 권력의 정통성을 지닌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가진 꽃
3) 분별력과 단아함을 지닌 여인의 이미지를 지닌 꽃
이승만의 특징:
1) 모든 풍상을 다 겪어서 인품이 완성의 경지에 이른 우러러 보이는 낯익은 노인
2) 해방 후의 한국에서 천황의 위상을 지닌 존재
3) 분별력 있는 단아한 자세를 지켜서 친근하게 우러러 보아야 할 누님같은 존재
위의 도식에서 1)과 2)는 서로 부합된다고 볼 수 있는 데, 3)의 경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과연 이승만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지닌 양성적인(兩性的, androgynous)인 이미지를 갖는 존재인지를 좀 더 개연성있게 설명해야 되는 데, 박광용교수의 글은 이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946년 가을에 서정주로 하여금 「국화 옆에서」를 쓰게끔 만든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은 누구일까요? 이를 살펴보기 위해선, 미당의 말을 좀 더 주의 깊게 들어 보고, 당대의 한국의 역사적 상황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적 상황도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어젯밤에 제 콤퓨터가 오작동을 해서 윈도우를 다시 깔고 이 글을 쓰느라고 시간에 쫓겨 오타가 많을 것입니다.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질문을 하시거나 댓글을 달아 주신 분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논문을 게재하는 중에는 시간에 쫓겨 답변을 제대로 못해 드릴지 몰라도 게재가 끝난 후에는 일일이 검색을 해서 반드시 답을 드리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각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이승만 박사의 곁>, {미당 자서전2}, 1994, 202쪽
2) <국화III>, {서정주 문학전집}4, 일지사, 1972,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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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의 비밀4>의 부연설명과 논문 목차(目次)
적빛넝마님의 글을 읽으니까 제 논문의 목차를 공개하는 것이 네티즌들께서 이해하기 편하실 것 같아서 목차를 올립니다. 현재 저는 제 글의 절반 정도를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제목: <국화 옆에서>바로 읽기-종천순일(從天順日)의 상징, '노오란'국화
I. 서론: 기존의 <국화 옆에서> 읽기의 여러 문제점
II.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
1. 박광용 교수의 글과 발표 당시의 국내상황
2. 필자의 자료조사와 발표 당시의 국제 상황
III. 신화적, 내재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
1. 미당의 시작법의 특징
2. 일본의 창세 신화
3. 일본의 태양신 신화
IV. 결론: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어서는 안될 '부족방언의 요술사'
오늘 아침 중앙일보를 보니까, 중앙일보에서 <서정주 상>을 제정해서,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린다고 합니다. 물론 그 상을 제정하는 데에 있어서 일등 공로자는 유종호 교수입니다. 유종호교수는 미당이 작고했을 때, 서기2000년을 문학사에 있어서, "이 나라 최고의 시인이 시쓰기를 그친 해"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미당의 "1000여 편의 시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시인'이라는 호칭을 극히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고 상찬하였습니다. 유종호 교수가 스스로 쓰고도 너무 흡족해서 여러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또 여러 군데의 미당평론모음집등에 위풍도 당당하게(?) 십여년에 걸쳐서 반복해서 싣는 글이 있는 데, 그것이 <소리지향과 산문지향>이라는 미당론입니다. 오늘 중앙일보에 실은 글도, 또 그 똑같은 논문에서 처음 몇 쪽을 발췌해서 실었더군요. 유교수가 그 평론 이외에 미당에 대해서 특별히 괄목할 만한 연구를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화영교수처럼 미당에 대해 단행본을 낸 것도 아닙니다. 과연 유교수는 미당에 대해서, 특히 그의 시작법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지 의심이 갑니다.
무릇 자의식이 있는 진정한 학자는 자기가 쓴 똑같은 글을 여기 저기 실으면서 매문(賣文)을 일삼지 않습니다. 그런 유종호교수와 김윤식교수 같으신 분들이, 한국 최고의 원로 비평가로서, 조선, 중앙, 동아 삼대 신문의 문화부 기자들의 측면 지원을 받으며, 우리나라의 문학판을 좌지우지하는 무서운 문화권력을 휘두른다는 것은 너무도 비통한 일입니다. 지적 사기를 일삼는 평론가들의 논법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논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지요. 유종호교수는 미당을 즐겨 "인용부호 빠진 이 나라 시인 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 "부족방언의 요술사" 내지 "부족방언의 마술사"라고 부릅니다. 저는 미당이 "부족방언의 마술사 내지 요술사"인 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제가 미당을 읽은 바에 의하면, 그는 언어의 요술사 내지 마술사로서의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당이 "부족방언의 마술사"라고 해서 "시인부락의 족장"이라는 월계관을 씌우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한 부족의 구성원이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마술사 내지 요술사를 그 부족의 "우두머리"로 뽑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 마술사가 줏대가 없는 기회주의자인 경우엔 더욱 그러하지요. 아래에 두 사이트를 링크 시켜 놓을테니까, 미당의 야누스적인 측면을 잘 고찰하시기 바랍니다.
1. 미당 시세계 마땅히 기려야--오늘 중앙일보에 실린 유종호 교수의 글
2. 미당의 친일시와 해방 이후의 활동
추신: 오늘 중앙일보 기사를 읽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급히 쓴 글이 되어서 철자법이 틀린 곳이 많을 것입니다. 그냥 올리니 양해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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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바로 읽기2
그렇다면, 1946년 가을에 서정주로 하여금 「국화 옆에서」를 쓰게끔 만든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은 누구일까요? 상술한 바 있는 <시 창작에 관한 노-트>를 보면, 미당은 <국화 옆에서>의 창작시기에 대해 앞서 인용한 회고담과는 상당히 다르게 진술합니다. 이 글에서 미당은 <국화 옆에서>가 갑자기 어느 날 쓰게 된 시가 아니고,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된 다양한 여성적 이미지들이 중첩되고 결합되어 생긴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좀 쑥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마는 내가 二十代에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어니 홀로 앉아있는 四十代의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흥! 저 아주머니는 핼쓱한 게 밉상이야. 얼이 빠졌어!'하고 비웃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지만, 인제 이 <국화 옆에서>를 쓸 무렵에는 어느 새인지 거기에서도 한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새로 이해하게 된 것도 서상한 바와 같은 것들의 많은 되풀이 되풀이의 결과임은 물론 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일(靜溢)한 사십대 여인의 미의 영상은 꽤 오랫동안--아마 2, 3년 그 표현의 그릇을 찾지 못한 채 내 속에 잠재해 있다가, 1947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 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 그루의 국화꽃에 머물게 되자, 그 형상화 공작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각주1).
우선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창작시점은 1946년이 아니라 1947년이 되고, 국화꽃이 상징하는 '사십대 여인의 미의 영상'이 미당의 내면에 싹트기 시작한 시점은 1945년 내지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미당이 그의 대표적인 친일시 <마쓰이 히데오 송가 (伍長頌歌)> 발표한 시점이 1944년 12월인 것을 고려할 때,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지닌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어니 홀로 앉아 있는 40대의 여인"의 이미지의 시원(始原)을 탐색하는 작업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은, 위 인용문보다 앞서 상술하길, 소복한 사십대 여인의 이미지에는 일련의 "격렬하고 잔잔한 여인의 영상들"이 중첩되어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첩된 영상들의 예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새로 자라오르는 보리밭에 뜬 달빛과 같은 애절한 여인
2) 오월의 아카시아 숲을 보고 그 향기를 맡는 것 같은 신선한 여인
3) 저 에집트의 여왕 크레오파트라와 같이 오만하고 요염한 여인
4) 산악(山岳)과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워 우리가 그 무릎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
5) 성모(聖母)마리아와 같이 다수굿하고 맑고 성스러운 여인
6) 황진이 같이 스스로도 멋지고 또 고차원의 온갖 멋을 이해할 수 있는 여인
미당은 이러한 여러 여인의 미의 영상의 체험이 중복되어서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미당의 국화꽃은 여인의 다양한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초월적인 여성, 융의 표현을 빌린다면, 태모(太母, Great Mother)의 이미지를 지닌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여성의 이미지가 일본 신화 속의 아마테라스의 이미지와 상당히 부합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미당이 언급한 4)의 여인의 경우, 미당은 그 여인을 산악에 비유하고 있는 데, 이것은 그 여인이 보통 여인이 아니고 신화적 여인, '태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누이를 산악(山岳)에 비유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미당은 그 산악과 같은 여인의 이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습니다. 성모 마리아, 크레오파트라를 언급하면서, 이 들보다 더 장엄한 이미지를 지닌 태모에 대해선 왜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해방 이후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 여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산악과 같은 여인=아마테라스"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1991년에 발표된 시집 <山詩>에 수록된 <일본 산들의 의미>라는 미당의 시 때문입니다. 그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옵니다.
얼시구!
天皇이 좋아하는 대나무에선
나비가 여덟 마리나 날아오르며
무우 아랫도리같이
자는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어서
'야 이건 우리들의 해의 女神님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께서
손수 낳으신 나비님들이시죠'하며
日本 사람들은 매우나 좋아했네 ({미당 시전집3}321)
여기서 미당은 천황과 해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언급하면서 일본 산들의 의미를 수수께끼같은 말들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당이 말년에 쓴 이 시는 그가 일본신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제 논문 본론부분의 두번째 장에서 <국화 옆에서>를 일본창세신화와 연계시켜 상세히 풀어나갈 예정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미당이 <국화 옆에서>를 창작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단지 국내의 상황만 고려할 것이 아니고, 국제적인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저는 미당의 국화꽃을 일본 문화적 상징물과 연관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일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박광용교수의 연구는 거의 해방 이후의 국내상황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만, 제 생각엔 그 당시의 일본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된다고 봅니다.
1944년 말엽에서 1947년 중엽사이에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는, 일왕의 인간선언입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46년 1월 1일 <신일본 건설에 대한 조서>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일왕의 인간선언이 지닌 의미에 대해, 역사학자 박경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조서에서 천황은 신일본 건설의 방침으로 5개조의 서문(誓文)을 내세우고, 이어서 천황과 국민의 유대는 상호간의 유대와 경애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화와 전설에 의한 종전의 왜곡된 신적(神的) 권위를 버리고 민주주의 사회·국가의 일원으로 국민과 함께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천황을 신으로 숭상하여 천황을 위해 전쟁을 하고 왕을 위해 죽는 것이 책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각주2) 일왕의 인간선언은 일본인들에게는 패망보다도 더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루스 베네딕트도 지적한 것처럼,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일본의 패망을 연합국에 항복한 것이라기보다는 천황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각주3). 일왕의 인권선언은 1946년 11월 3일 신일본국헌법이 공포됨으로써 법제화됩니다. 이 헌법에 따르면,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주권자였던 천황은 일본국 및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의거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각주4). 즉 신일본국헌법에서, 국가의 주인은 일왕이 아니라 국민이며, 일왕은 신적 권위를 더 이상 지니지 못한 상징적 존재, 일체의 정치적인 권한을 지니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 됩니다.
일본국헌법이 공포된 날짜가 11월3일이라는 것은 많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날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죽은 뒤에도 조선신궁에 신으로 모셔진 메이지왕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리고 명실상부한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 왕이 일본인들의 정신영역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국화와 칼}에서 루스 베네딕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정말 큰 이변이 일어난 것은 정신적 영역이었다. 주(忠)는, 최고 사제(司祭)이며, 일본의 통일과 무궁함의 상징인 신성한 수장 곧 왕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가 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주(忠)가 이처럼 쉽게 왕에게로 옮겨진 것은 황실을 태양의 여신(天照大神)의 후예라고 하는 옛 민간 신화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139-140쪽). 신화로부터 자신의 신성불가침한 권위를 끌어 왔던 왕이 11월3일을 기점으로 법적으로 한 평범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그에게 충성을 다한 일본인들에게나 친일파 한국인에게나 모두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정주는 1946년 가을 내지 초겨울, 일왕 및 그 가족을 상징하는 노오란 국화꽃을 보면서, 적국인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현인신에서 범인(凡人)으로 몰락한 일왕을 떠올리며, 인생무상의 감정을 느꼈을 개연성이 큽니다. 인간선언 후, 일왕은 국화 훈장과 국화 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천황복을 벗어버리고 평복을 입은 채 전국을 순례하면서 자신이 보통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다녔는 데, 이러한 일왕의 극적인 변모를 지켜보면서 미당의 마음 속이 온갖 상념으로 복잡했으리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존의 학자들이 <국화 옆에서>를 일본제국주의와 연관지어 생각하지 못한 데에는, 부분적으로는 실증적 자료에 대한 부주의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국화꽃을 파란만장한 삶을 거친 후 관조의 단계에 이른 40대의 시인 서정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는 데, 이는 <국화 옆에서>의 발표 시점 (1947)과 <서정주시선>에 수록된 시점 (1956)을 혼돈한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광용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서정주가 이 시를 발간한 때는 32세였으므로, 40대의 중년여인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그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나이는 46세 였습니다(52).
오늘 제 논문의 본론의 첫번째 장을 다 썼습니다. 논문 연재가 너무 길어져서 네티즌들이 싫증을 느끼시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저로선 힘들게 쓴 글이 되어서 네티즌들께 여러 부연설명을 드리고, 구체적인 예를 들다보니까, 제 실제의 논문보다도 분량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제가 금요일까지 처리해야 될 일이 있어서 내일은 논문을 게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토요일 날 11시에 글을 다시 올리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각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시창작에 관한 노-트>, {창작기법} (예지각, 1982) 107-108쪽.
2) 박경희,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일빛, 471쪽.
3) {국화와 칼}, 김윤식역, 을유문화사, 144-5쪽 참조.
4) 박경희의 책, 472쪽
------------------<2001년 6월28일. 창비 자유게시판에서 펌>--------------
국화꽃의 비밀6: 언어의 흑색 요술사 I
II. 신화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1:
1) 미당의 시작법의 특징
미당의 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시작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의 여러 시론을 읽으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입니다. <시와 암시>라는 시론에서 미당은 시(詩)가 산문과 다른 특징은, "백마디나 천마디 혹은 만마디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다 하는 것이 아니고 요약해서 말은 되도록이면 조금만 하고 그 나머지는 암시(暗示)로써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문학작품의 뉘앙스]라는 글에서, 미당은 당시에 일고 있던 민중문학운동의 비예술성을 비판하면서 "문학의 시나 소설이나 희곡은 그 언어 매력과 의미와 영상들의 효율 높은 구상-구성을 통해서, 시는 또 산문의 언어 사용량이 무제한성과는 다른 단축되는 언어 사용권의 필연인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의 구성의 노력에 의해서 성립되어 온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도 거부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각주1) 이러한 시론에 입각해서 시를 쓴 만큼, 미당은 온갖 시작법--비유(은유+직유), 상징, 인유(引喩), 생략 등등--에 통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부족방언의 마술사" 내지 흑색 요술사의 재능이 풍부한 인물이지요. 따라서 미당이 말하는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적 모티프(motif)와 상징이 지니는 의미를 해독해야하는 데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미당은 그야말로 '기상'(奇想, conceit)과 인유(引喩)의 요술사이기 때문입니다. 상징을 시각적 청각적 암시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신화와 전설, 민담 및 다른 고전문학에서 그 모형(母型)을 빌려와 시상(詩想)을 형성하는 인유(引喩)라는 기법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니까요.
[시의 암시]란 글에서 미당은 스테판 말라르메의 <에로디아드>라는 시에 나타난 거울을 상징적 암시의 예로 들면서 자신의 시론을 펼쳐나갑니다. 이 글에서 미당은 거울을 시각적 암시를 위한 상징물로 활용할 때 시인은 거울의 밝은 경면(鏡面) 뿐만 아니라 거울 뒷면의 캄캄한 어둠을 똑같이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당산문}296-299). 상징물로서 거울이 지닌 여러 속성--빛, 어둠, 차가움, 시각적 환상등--을 다 알고 있는 미당이 <국화 옆에서>에서의 거울을 관조 내지 자기성찰을 뜻하는 단순한 상징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은 좀 순진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징에 대한 이러한 그의 시론에 걸맞게, 미당 자신이 사용하는 상징도 다의성과 양가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당의 시들은, 초기작인 [화사], [귀촉도]로부터 [신라초], [질마재 신화],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에 이르기까지, 신화와 전설에서 그 모티프를 따온 것이 많습니다. <불교적 상상과 은유>에서 미당은 "아무리 작은 꽃잎사귀도 가로 세로 뻗쳐서 일만리는 가느니......"라고 표현한 불교적 상상력의 무한성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각주2). 그는 불교적 상상력을 지니지 못한 이들 혹은 '논리라는 속물'을 앞세우는 사람들에게는 "'무당판수' 놀음" 내지 '상상(想像)에 이로(理路)가 안 닿는 표현'으로 여겨지는 것이 실상은 고도의 상상과 은유에 바탕을 둔 것임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미당은 또한 그러한 '상상에 이로가 닿지 않는 표현'의 생성을 독자나 평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모형(母型)을 제시하는 데, 그 대부분이 신화 내지 설화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미당은 {동천}이란 시집에 수록된 <여행가>라는 시의 첫 연을 예를 들면서, 자신의 시상(詩想)의 발생과정을 설명합니다.
행인들은 두루 이미 제집에서 입고 온 옷들을 벗고
萬里에
나라가는 학두루미들을 입고
이러한 시상을 소개한 뒤에 미당은 부연설명하길, "또, 이런 표현이 근년 내 시의 어느 귀절에 보인다. 그란, 그 상상의 유니크한 이유로 혹시라도 시새워하는 이가 있다면 안심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이것도 그 母型이 되는 이야기가 三國遺事 속의 이야기 속에 또 들어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즉 미당의 이러한 독특한 발상은 그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대산 월정사 오류성중>에 나오는 일화를 세 행으로 줄여서 표현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각주3). (여기에선 글의 흐름을 신속하기 위해 설화의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읽고 싶으신 분은 각주에 링크시킨 사이트로 들어가셔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미당이 이처럼 상징과 인유를 즐겨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미당의 시는 대부분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표면서술과 심층서술 사이에 간극 내지 긴장감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작법을, 롤랑 바르트라는 이론가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제1의 기호체계(언어체계)와 제2의 기호체계 (신화체계)가 있는 서술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바르트는 그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신이 이발소에서 본 프랑스 <파리 마치 Paris-Match>지의 표지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 잡지의 표지는 프랑스 삼색기를 올려다 보면서 경례를 하는 흑인(negro)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데, 바르트는 여기에서 두 개의 기호체계를 인지하게 됩니다. 제 1의 기호체계에서는 우리는 그 그림을 보면서, '군인이 프랑스 국기를 향해 군대식 경례를 한다'라는 의미를 읽어 내지만, 제2의 기호체계에서 우리는 "프랑스 제국주의(french imperiality)"라는 것을 읽게 됩니다. 즉, 제2의 기호체계에서 그 그림은 '프랑스는 식민지인이였던 흑인도 저렇게 군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복한 표정으로 프랑스 국기에 기꺼이 경례하는 좋은 국가'라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Mythologies, Hill & Wang, 111-121).
저는 <국화 옆에서>도 그러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화꽃과 거울이 일제 강점기를 체험한 우리에게 중요한 문화적 상징물인데다 서정주의 친일행적이 뚜렷한 만큼, 그의 시를 제1의 기호체계에서만 의미해독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에 대해선, 내일 상술할 생각이기 때문에, 여기에선 다른 시들--목화, 누님의 집, 견우의 노래--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2) 목화, 누님, 직녀의 실체는?
서정주의 상징과 인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태껏 평자들은 미당의 시세계를 서구 고대신화 및 성경, 한국 신화와 연결지어 분석을 해왔지만, 일본신화와 연계지어 분석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일 수 있는 영역을 불모지로 남겨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은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만큼, 일본 신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메이지 일왕이 바쿠후시대를 종결지은 후 현인신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하게 된 결정적 근거가 일본의 고대신화의 천손강림설에 있었듯이, 일본인들은 우리를 통치하고 동화시키기 위해서 일본신화로부터 그 근거를 찾았습니다 ( 제가 사부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고대창세신화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최석영씨가 쓴 두 권의 책 {일제하 무속론과 식민지권력}(서경문화사, 1999)과 {일제의 동화이데올로기의 창출}(서경문화사, 1997)을 읽으면, 일본이 우리 지식인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쓴 주된 책략이 일본의 고대신화--<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술된 일화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만든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 및 일본고대신화를 연구하여 '불함문화론"을 세운 최남선은 나중에 '한민족=일본민족'이라는 등식을 마련해 "일선문화동원론(日鮮文化同原論)"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단군사상은 민족의 주체성을 부각시키는 대신 한국인이 쉽사리 자신을 일본인과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각주4). 그 일선동조론의 시원이 되는 신화는 <일본서기>에 나타난 스사노오노미꼬토(須佐之男命)라는 천신의 강림신화입니다. 이 신에 대해서는 내일 자세히 설명드릴 예정이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히만 언급하겠습니다. 이 신은 아마테라스 태양신의 친남동생으로 일본신 가운데는 두번째로 중요한 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사노오는 영웅적인 일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난폭한 탕아의 기질이 있어서 천상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일본서기}(전용신역, 일지사, 30쪽)에 따르면,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지상계로 내려와서 최초로 머문 곳이 '신라국의 스시모리' 혹은 '소의 머리땅(曾尸茂梨, 牛頭)'라고 합니다(각주5).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스사노오를 신라인으로 보았습니다. 또 일제시대에 많은 학자들은 "단군=스사노오"라고 주장하면서 조선신궁에 스사노오신인 단군을 추가봉재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최석영의 {일제하 무속론......}113-116쪽). 얼핏보기엔 그럴듯해 보이는 이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쫓겨난 악왕자(惡王子)로서 일본에서 제대로 존경받지도 못하는 신일 뿐만 아니라, 조선신궁에서도 제신으로 삼지 않은 신이였기 때문에, 한일불평등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각주----------------------------------------
1) 정봉래엮음, {시인 미당 서정주--그 문학과 생애}, 좋은글, 1993, 277쪽.
2) {서정주문학전집2} 266-9쪽
3)http://dalma.dongguk.ac.kr/~kkj/Silla/SAM/s7_8.htm
4)http://banmin.or.kr/n_pds/chinilpa99/99frame.htm
5)신라신 스사노오노미코토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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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의 비밀6: 언어의 흑색 요술사2
이러한 일제강점기의 '동화이데올로기' 내지 조선신도 사상의 측면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일본은 스사노오의 누님인 아마테라스가 군림하는 '누님의 집'이고, 우리나라는, 특히 신라는 '남동생의 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당의 시에 등장하는 누님 내지 신라를 좀 더 넓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선 일부 네티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방 이듬해에 발간된 {귀촉도}란 시집에 수록된 시 가운데 세 편의 시--<목화>, <견우와 직녀>, <누님의 집>--이란 시를 일본 신화와 연계지어 간략히 살펴 볼 생각입니다. 이 세 편의 시는 앞서 말씀드린 일차적인 기호체계 (표면구조)에선 순진무구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선 목화라는 시를 살펴보겠습니다.
<목화(木花)>
누님.
눈물 겨웁습니다
이, 우물 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
다수굿이 젖어있는 붉고 흰 木花 꽃은,
누님.
누님이 피우섰지요?
퉁기면 울릴듯한 가을의 푸르름엔
바윗돌도 모다 바스라저 네리는데
저, 魔藥과 같은 봄을 지내여서
저, 無和한 여름을 지내여서
질갱이 풀 지슴ㅅ길을 오르 네리며
허리 굽흐리고 피우섰지요?
이 시를 대부분의 평자들은 권일송씨처럼, "붉고 흰 목화꽃을 보면서 누님의 정성, 누님의 설움, 누님의 향수를 아련히 떠올리는 시의 묘법(妙法)이 펼쳐진다. 목가적, 동화적인 그리움과 현실 긍정, 잡티가 묻지 않은 영혼의 날개가 파닥이는 순간들의 기억이 묻어나 있다. 이쯤이면 굳이 시에서 시상이라든가 이미지 따위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해석합니다({시인 미당서정주-그 문학과 생애} 462 쪽). 하지만, 이러한 순진무구한 해석은 미당이 얼마나 음흉한 언어의 요술사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평자에 의해서 읽혔기 때문입니다. 앞 부분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서정주는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와 시상의 정교한 배열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 시인입니다.
<木花>에서 누님은 아마테라스가 될 수도 있고, 천손강림신화의 주인공인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邇邇藝命)의 아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손(天孫) 니니기가 지상에 처음 내려와 첫눈에 반해 결혼한 여자의 이름이 '木花'(코노하나노사쿠야비메)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신화 속의 목화는 솜의 재료인 목화가 아니라, 벚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만, 어쨌건 일본 황실의 시조인 니니기의 아내 이름은 <일본서기>에서나 <고사기>에서나 똑같이 '木花'로 기록되고 있습니다({고사기}149, {일본서기}44). 일본 신화 속의 많은 신모(神母)들이 그러하듯 일본황실의 대모(大母)라 할 수 있는 목화(木花)도 극적인 삶을 산 여인입니다. 천손인 니니기는 목화에게 반해서 혼인해 하룻밤을 잤는 데, 바로 그 날로 목화가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니니기는 목화를 의심해서 그녀가 임신한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 다른 신의 자식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목화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문이 없는 방을 만들고 맹세하길, "내가 임신한 것이 다른 신의 아이라면 반드시 불행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천손의 아이라면 반드시 씩씩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자신이 방에 불을 지릅니다. 결국 세 명의 아들이 불 속에서 무사히 태어나, 지상계를 지배하는 그 다음 통치자가 됩니다. 즉, 일본황실의 대모(大母)인 목화는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을 자초할 정도로 한(恨)을 지닌 여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서정주가 <木花>라는 시를 1946년에 발표할 때, 자기 고장의 목화꽃만을 생각하고 토속적 정서에 젖어서 썼을까요? 다음은 <누님의 집>이라는 시를 살펴보겠습니다.
<누님의 집>
바다 넘어 九萬里
山넘어서 九萬里
등ㅅ불 들고 네려 가면,
우물 물이 있느니라.
먹탕 같은 우물 물
千길을 네려 가면
굴딱지 같은,
도적놈의 게와집이 서 있느니라.
大門열고 中門열고
돌門을 열고
바람되야 문틈으로 슴여 드러가면은
그리운 우리누님 게 있느니라.
도적놈은 어디 가고
우리 누님 홀로 되야
거울 앞에 흰옷 입고 앉었느니라.
이 시에 우물, 게와집, 흰옷등의 이미지가 등장한다고 해서, 이것을 상복을 입은 토속적인 한국적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볼 경우, 이는 서술의 제1차 기호체계(표면구조)만을 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 연을 제대로 읽어보면 화자가 말하는 공간이 흔한 동네 마을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다넘어서 구만리, 산넘어서 구만리'에 있는 어느 우물 속의 세상입니다. 즉 누님이 살고 있는 공간은 신화적 세계--지하의 세계(황천국) 내지 해저의 세계(용왕국)--입니다. 상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우물과 흰색을 단순하게 동네 우물 내지 소복한 여인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흰색은 색 중에도 가장 다의적인 상징적 의미를 포함하는 색깔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여러 세계 상징사전을 살펴보면, 흰색은 삶과 죽음, 순수와 공포, 햇빛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주적 비의 내지 신성성(神聖性)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도둑과 승려를 의미하는 색으로서, 특히 신도(信徒)의 신주(神主)의 옷이 흰색입니다 ({한국문화상징사전}참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詩}에 수록된 <흰 옷의 빛깔과, 버선코의 곡선 이야기>란 시를 보면, 미당이 흰색의 다의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환웅이 맨처음 단군에게 입힐 옷을 정할 때 웅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야 아야 아야야 치사스레 아파 하는 빛이어서는 안돼! 엉엉엉 울지도 않고, 늘 점잖고 의젓하게 웃고만 있는 그런 빛을 한번 찾아 보시오. 쓰거운 쑥 맛, 매운 마늘 맛, 두루 다 겪고 난 임자 배가 덩그랗게 나아 놓은 아이 옷이니까요" 남편 환웅이 이렇게 말하면, "그럼, 깜짱·빨강·파랑·노랑 다 아니고, 흰빛이나 그래도 그 중 어울리겠어요" 곰이 둔갑해 낸 아내는 하얀 박꽃 비스듬히 웃어도 대면서 말씀이어요. 그래, '그게 좋겠소. 하늘도 사실은 흰빛입니다. 그게 너무 멀어서 낮에는 푸르게 보이고 밤에는 캄캄해 보일 뿐이지......" 환웅께서 대답하시어, 그 흰빛으로 이 겨레의 옷빛은 처음으로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이 올시다
이처럼, 미당은 흰옷의 다의성--생명, 성숙한 여인, 우주적 비의 내지 신성성--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물은 동양과 서양의 신화와 민담 속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물로서, 여성성(feminine principle), 재생, '대모(大母)의 자궁'을 뜻합니다. 특히 지하세계 내지 해저에 있는 우물은 많은 상징적, 신화적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또한 <누님의 집>은 <일본서기> 내지 <고사기>로 부터 인유를 발견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보면, 천손 니니기의 아내(木花)는 불 속에서 자식을 세 명 낳았는 데, 그 중 두 명--호데리노미코토(火照命)와 호오리노미코토(火遠理命)--이 서로 내기를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서로 자신들의 도구를 바꿔서 내기를 했는 데, 동생인 호오리가 형의 낚시도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해신(海神)이 사는 바다 속 궁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가 아내인 토요타마비메를 만나게 된 곳이 바다 속 궁전 밖에 있는 우물입니다. 토요타비메는 호오리에게 한 눈에 반해 결혼하게 되고, 나중에 호오리가 형의 낚시도구를 되찾아 지상계로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해산하기 위해 지상계로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호오리가 산실(産室)을 엿보아선 안된다는 자신의 금기를 깨고, 몰래 상어로 변신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자, 모욕감을 느껴서, 남편과 자식을 남겨둔 채, 홀로 바다 속의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이처럼, 아마테라스 증손부에 관한 신화의 내용이 <누님의 집>을 구성하는 시상--바다, 우물, 홀로 된 흰옷 입은 여인, 도적놈--과 상당히 흡사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견우의 노래>의 경우, 아마테라스 여신이 "베짜는 여인"(織女)이었고,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지상계로 쫓겨 온 곳이 신라국의 '소의 머리땅(曾尸茂梨, 牛頭)'이었고, 또 이 시가 발표된 시기가 해방 이듬해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미당이 스스로를 지상에 유배 온 "스사노오-견우'로 생각하고, 구름 너머, 바다 건너, 천상계에서 비단을 짜는 직녀 아마테라스를 그리워하면서 쓴 시가 <견우의 노래>라고 보는 것이 아주 황당하기만 한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비단은 연오랑과 세오녀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햇빛을 상징하는 천인만큼, 그 비단짜는 직녀를 아마테라스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木花, 바다 속의 우물, 비단을 짜는 천상의 직녀를 그리워하는 견우, 국화꽃과 거울, 이 모든 것이 1946년 전후에 쓰여진 시 속에 나타난 것은 우연에 불과할까요? 이 모든 시가 한국의 목가적, 토속적 정서를 형상화한 것일까요?
내일은 <국화 옆에서>를 일본 신화와 연계지어 상세히 분석해 보겠습니다. 제 생각엔 <국화 옆에서>가 보이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비상식적인 시상의 배열과 시어의 구성 은 그 모형(母型)이 되는 이야기가 신화 속에 있기 때문에 초래된 예술적 비약 내지 단층(斷層)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시를 몇 편 예를 들다보니까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제가 그간 새롭게 공부한 자료들이 있어서, 이를 첨가하느라고 새롭게 써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2001년 6월 30일. 창비게시판에서 펌;계속>-----------------
국화꽃의 비밀8: 거울, 누님, 천조대신
II. 신화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2:
2) <국화 옆에서>와 아마테라스 동굴 칩거신화
제3연의 경우, '젊음의 뒤안길,' '거울,' '누님'의 상징성을 풀이하는 것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국화꽃의 비밀6-언어의 흑색 요술사1>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미당은 거울을 상징물로 활용할 때 거울의 밝은 경면(鏡面) 뿐만 아니라 거울 뒷면의 캄캄한 어둠을 똑같이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상징의 다의성--빛, 어둠, 차가움, 시각적 환상 등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언어의 요술사입니다({미당산문}296-299). 많은 평자들이 <국화 옆에서>에서의 거울을 관조 내지 자기성찰을 뜻하는 단순한 상징으로만 본 것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재홍교수는 3연의 처음 두 행을 젊은 날을 "살냄새와 피냄새가 섞여 있는 무겁고 어두운 모습"으로 제시한 것으로 해석하고, 뒤의 두 행을 "성숙한 정신의 가벼움"을 나타낸 것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그는 거울을 "정관과 명상의 가벼움"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각주1). 또한 천이두교수와 김화영교수는 거울 속의 누님을 시인 자신으로 보았습니다. 천이두교수는 이 3연을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던 머언 먼 젊의 뒤안길>을 영원히 이별할 수 있을 만큼,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조용히 살피는 관조의 거울 앞에 설 수 있을 만큼, '나이든' 시인 된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있고, 김화영교수는 ''<거울>은 여기서 현재의 나와 욕망에 휘말리던 젊은 시절의 나 사이에까지도 <머언 먼>를 만들어 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단절이 아니라 거리들 둔 親和를 의미한다. 거울에 비친 나도 여전히 어떤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菊花는 그러니까 거리를 둔 친화의 꽃이요, 그 인식이 피워낸 꽃이다"라고 해석합니다(각주2).
하지만 "국화꽃=시인=누님"이라는 천이두교수와 김화영교수의 생각은, 미당 자신의 회고담과 발표 시기의 미당의 나이, 또 시 속의 화자의 역할을 고려할 때, 억지스런 구석이 많습니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3연과 4연--"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 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을 연결지어 해석할 경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우선 누님이 관조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경우, 그런 누님의 내면은 불면의 밤을 보낸 시인의 내면과는 서로 대립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누님=시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기 힘듭니다. 미당 자신은 <시 창작에 관한 노-트>에서 3연 속의 누님을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는 40대의 여인'으로 풀이하면서, 그 이미지는 오랫동안 그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온 여러 여인들--달빛같은 여인, 아카시아 숲 같은 여인, 산악같은 여인, 클레오파트라, 성모 마리아, 황진이 등등--의 영상이 중첩되어 생긴 결과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서정주는 자신이 4연을 완결지었을 때 "밖에선 무서리가 오는 듯한 늦가을의 싸늘한 새벽이었는 데, '내가 안 자고 혼자 깨어 있다'는 호젓한 생각 끝에, 밖에서 서리를 맞고 있을 그놈을 생각하자, 그것은 용이히 맺어졌습니다"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즉, 마지막 연의 국화꽃은 싸늘한 새벽의 무서리 속에서 고독하게 홀로 피어있는 존재, 어둠과 빛의 경계선에 있는 존재입니다. 모든 고통을 초탈한 채 관조의 경지에 이른 존재는 아닙니다.
<국화꽃의 비밀5>에서 말씀드렸듯이, 미당은 국화꽃의 시상 속에 중첩되어 있는 여러 여인들의 영상에 대해 언급하면서 "산악(山岳)과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워 우리가 그 무릎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에 대해선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있는 데, 저는 그 태모(太母)의 이미지를 지닌 여인이 아마테라스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우선 텍스트 내재적 측면에서 말씀드리면, 어제 상술한 바와 같이, 아마테라스의 탄생에 등장하는, 사별한 아내가 그리워 황천국으로 간 남편, 모체(母體)의 부식과 천둥신 등의 시상(詩想)이 <국화 옆에서>의 소쩍새와 천둥이 형성하는 시상과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아마테라스 동굴칩거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화소들--동굴칩거, 누이의 귀환, 거울 앞에 선 여인--이 <국화 옆에서>의 3연과 4연의 시상과 맞물리는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당의 국화꽃이 황색이라는 것은, 굳이 일본문화권과 연계지어 해석하지 않아도, 태양빛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본문화권에서 거울이 태양신의 상징이 된 것은 아마테라스의 동굴칩거 신화 때문이었습니다. {고사기}에 기록된 동굴신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자나기는 황천국에 내려가 불결해진 자신의 몸을 바닷가에서 씻는 동안, 십여 명의 자식을 낳았는 데, 이자나기는 특히 딸인 아마테라스를 사랑해서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다스리게 하고, 스사노오에게는 바다를 다스리게 하였다. 하지만, 스사노오는 황천국에 있는 어머니가 그리워 산천초목이 모두 죽어갈 정도로 울었다. 이에 화가 난 이자나기는 아들에게 황천국으로 갈 것을 명하였고, 스사노오는 누님에게 작별인사를 한다는 핑계로 천상계로 올라온다. 난폭한 동생의 등장에 놀란 태양신은 그가 천상계를 찾아온 이유를 의심하게 된다. 스사노오는 자신의 결백을 자식낳기 경쟁을 통해 증명한 뒤에, 기쁨에 도취되어 천상계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마테라스가 경작하는 논두렁을 부수고, 개천을 메워버리고, 제물로 바쳐진 신전의 햇곡식에 똥을 뿌리는 등 목불인견의 행동을 한다. 이러한 그의 망나니 짓을 선의로 받아들이려 애쓰던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자신이 거쳐하는 '기복실'(忌服室: 신의 옷을 짜는 청정하고 신성한 건물)의 천장을 뚫고 얼룩말 가죽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베짜는 하녀가 베틀북에 음부가 찔려 죽자, 동생이 두려워 '천석옥호(天石屋戶)'라는 동굴로 숨어 버린다. 이에 천상계와 지상계가 암흑으로 변하고, 각종 재앙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던 신들은, 결국 거울을 만들어 여신을 동굴 밖으로 끌어 낼 계획을 세운다. 아마테라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기 위해, 신들은 동굴 밖에서 소란스런 축제를 벌리고, 여신은 암흑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상치 않던 축제가 궁금해서 동굴 문을 살짝 열고 내다 본다. 이에 다른 신들은 준비한 거울로 여신을 유혹한 후 손을 잡아 채서 동굴 밖으로 완전히 끌어 낸다. 다시 세상은 빛으로 가득차게 되고, 난폭한 동생 스사노오는 벌을 받은 후에 천상계에서 추방된다. 나중에 아마테라스는 자신의 손자 니니기(邇邇藝命)에게 지상계를 다스리도록 명하면서, 자신을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한 거울을 징표로 준다, 이 때 아마테라스는 니니기에게 "이 거울을 오로지 나의 혼(魂)으로 여기고, 내 자신을 모시는 것처럼 우러러 모시도록 하여라"라고 말하였다. (각주3)
이처럼 일본신화에서 거울은 아마테라스의 귀환과 천손강림을 다룬 신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상징물입니다. 문제아 동생 스사노오의 횡포로 인해 동굴로 피신 갔던 착한 '누님-아마테라스'가 밀폐된 동굴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동굴 틈새로 보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천손강림시 아마테라스가 손주 니니기에게 자신의 혼(魂)이 담긴 것이라고 하면서 주었다고 하는 이 거울(八咫鏡)은 그 진품이 이세신궁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데, 일본인들이 천손강림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일본 황실이 만세일계의 혈통, 즉 영원성을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화 옆에서>의 3연과 4연은, 아마테라스 신화가 보여주는 여러 시상들----베짜는 하녀의 죽음, 아마테라스의 동굴 칩거, 거울을 들여다보는 스사노오의 누이 아마테라스, 아마테라스의 귀환 등등--과 태양신의 후손인 일왕의 인간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형상화되었을 개연성이 큽니다. 종천순일파적인 삶을 살아온 미당에게 있어서, 젊은 시절 광영의 길을 걷던 '국화꽃-일왕'이 패망 이후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와 상징적 군주로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 가슴 속에 한(恨)을 지닌 채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는 40대의 여인'의 모습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특히 늦가을 무서리를 맞으며 홀로 새벽의 어둠을 견디는 국화꽃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국화 옆에서>의 3연에 등장하는 거울엔 두가지의 상징적 의미--동굴에서 귀환한 아마테라스 태양신의 혼이 담긴 신기(神器)로서의 거울과 영욕(榮辱)의 삶을 살아온 인간이 본래적 자아와 대면하는 장(場)으로서의 거울--가 중첩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 외에도, 아마테라스 신화를 구성하는 여러 다른 화소(話素)들--사별한 님을 향한 통곡, 수놓는 혹은 베짜는 지고지선(至高至善)한 누이, 여인의 고독한 은둔, 천상계에서 추방되어 세상을 떠도는 탕아(蕩兒) 등등--은 미당의 시세계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견되어지는 화소들과 유사합니다.
그럼, 본론을 마무리 지으면서, 제가 미당의 국화꽃을 일왕과 아마테라스의 영상이 중첩되어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여러 근거들을 다시 간추려 적어보겠습니다.
1) 일본제국주의시대에 황국(黃菊)은 일본 황실과 태양을 상징했다. 조선신궁의 제신이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이었는 데, 그 곳에 삼종신기의 하나인 거울이 있었다. 신도(神道)의 신주(神主)들이 신궁이나 신사에서 흰색의 승복을 입은 채 둥근 거울 앞에 서서 기도할 때, 그 거울이 아마테라스를 상징했다.
2) <국화 옆에서>의 창작시점과 천황의 인간선언 시점이 다같이 1946년 무렵인 데다, 인간선언 후 현인신에서 평범인으로 돌아 온 히로히토왕의 이미지와 4연에 묘사된 늦가을 무서리 속에 피어있는 국화꽃의 이미지가 많이 유사하다.
3) 미당이 말하는 국화꽃 여인들의 영상 중에 하나인 산악(山岳)같은 여인이 말년에 쓴 <일본 산들의 의미>라는 시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일 개연성이 높다.
4) 아마테라스 탄생신화에 등장하는, 이자나기의 죽은 아내에 대한 사랑, 황천국으로의 여행, 모체(母體)의 부식(腐蝕)과 천둥신의 등장이 <국화 옆에서>의 1연의 소쩍새와 2연의 천둥에 상응한다. 또한 아마테라스 동굴칩거 신화에 등장하는 거울과 누님의 귀환이 제 3연의 시상과 유사하다.
5) 일본신화 속의 大母들--이자나미, 木花, 토요타비메--이 한결같이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어니 홀로 앉아있는 여인' 내지 '서릿발 속의 국화꽃'의 이미지를 지닌 여인들며, 특히 시집<귀촉도>에 수록 된 시 <木花>가 천손강림설의 주인공 니니기의 아내 이름과 동일하다.
6) 일제 강점기에 팽배해 있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에선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를 단군 내지 신라인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국화 옆에서>, <누님의 집>, <木花>에 등장하는 누님을 일본 내지 아마테라스로, 남동생을 우리나라 내지 서정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7) 일본어를 국어로, 일장기를 국기로 생각해 온 미당이 국화꽃에 대한 여러 편의 시와 다양한 내용의 수필을 쓰면서도 이상스러울 정도로 단 한번도 일본문화권에서의 국화꽃의 상징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즉, 국화꽃을 보면서 단군, 웅녀, 신시(神市)을 연상하는 미당이 일본의 상고시대를 연상하지 않았을 리 없는 데, 이를 고의적으로 은폐했을 가능성이 크다.
내일은 결론을 써서 올리겠습니다. 여태까지 제 장황한 글을 읽어주신 네티즌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각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미당 서정주--대지적 삶과 생명에의 비상' 108쪽.
2) 천이두, [지옥과 열반], 박철희편, {서정주}, 26쪽. 김화영,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 60쪽.
3) {고사기} 60-76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
-------------<2001년 7월2일 창비게시판에서 펌;계속>------
국화꽃의 비밀9: <요술사-족장>의 사상
IV. 결론: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어서는 안될 '부족방언의 요술사'
저는 지금까지 글을 써오면서 <국화꽃 옆에서>의 국화꽃이 의미하는 바를 밝히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비록 하나의 작품에 제 노력을 집중시키긴 했지만, 미당의 많은 작품들--시, 수필, 시론, 자서전--을 읽으면서, 제 생각의 균형을 잡기 위해, 미당의 예술적 재능을 이해하기 위해, 예술가로서의 미당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제가 미당의 국화꽃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그토록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국민적 애송시로 칭송받는 그 시가 함축하고 있는 위험스런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습니다. 미당의 시를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는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이 지니는 언외(言外)의 부정적 암시력이, 즉 미당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량(小量)으로 정선(精選)해 가지는 언어의 그늘에 함축해 지니는 바의 무진(無盡)한 암시력(暗示力)"의 이면(裏面)이, 지난 반세기 동안 평자들에 의해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국화꽃으로 상징될 수 있는 미당의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인 세계인식은 그 이후의 시세계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는 만큼, 저는 그 시원(始原)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어제 쓴 본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가 왜 "국화꽃"이 천황과 천조대신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형성된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지에 대해선 정리해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오늘 쓰게 될 결론에선 미당의 다른 작품 속의 종천순일적 사상에 대해 제가 그간 공부해 온 바를 간략히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미당이 죽은 지 반년 남짓한 시점에, 미당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한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이 땅의 평론가들과 언론은 서둘러 졸속으로 <미당문학상>을 제정했습니다. 그 상은 미당의 작품 속에 드러난 사상을 철저히 도외시한 채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온당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미당이 작고했을 때, 원로 평론가 유종호교수는 동아일보에 미당 서정주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유교수는 서기 2000년을 문학사에 있어서는 "이 나라 최고의 시인이 시쓰기를 그친 해"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하며, 미당의 "1000여편의 시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시인'이라는 호칭을 극히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고 극찬하였습니다 (각주1). 유교수의 미당 사랑은 애도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미당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일등공신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신문이나 미당평론모음집에 반복적으로 실리는 유교수의 글은 놀라울 정도로 늘 똑같은 평문입니다. 1994년 {작가세계}에 실린 <소리지향과 산문지향-미당 시의 일면>이라는 글은, 미당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잣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의 평문의 결론부분에서 유교수는 미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미당은 청년기에 {시인부락}이란 시 동인지의 동인이었다고 한다. 반세기 후 그는 인용부호 빠진 이 나라 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이 되었다. 족장의 사상을 깊이 검토하는 일은 이 자리에서는 불가능하다. 이 족장에 대해서는 시인부락 쪽에서 이런저런 비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작품을 읽고 그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그런 일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 부족방언의 요술사이자 시인부락 족장인 미당 시가 좀 더 널리 향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씌어진 이 글은 어디까지나 미당론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각주2)
이 글에서 유종호교수는 미당을 '이 나라 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이며 '부족방언의 요술사'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당을 '부족방언의 요술사'라 평가하는 유교수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미당은 한 송이 연꽃 속에서 끝없는 공간의 확장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한 송이 국화꽃 속에 담겨있는 바다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을 지녔습니다. 현재의 삶 속에서 '상대본연의 음향'을 듣고, 고대 설화와 현대시를 하나로 엮어내고, 죽은 영혼들과의 혼교(魂交) 내지 영통(靈通)을 통해 영원한 삶을 살고자 할 정도로, 뛰어난 신화적 상상력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은유와 상징을 통해 수(繡)를 놓듯, 베를 짜듯, 정교한 예술품으로 형상화할 줄 아는 예술적 능력을 지녔습니다. 아마도 유교수가 말한대로 "오묘한 부족 방언"의 마술사 내지 요술사로 평가될 수 있을 정도로 미당은 "'부족방언(部族 方言)'의 순화와 세련"에 큰 기여를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당은 '부족방언의 요술사' 내지 마술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시인부락의 족장'이 될 수 없는 인물, 되어서도 안되는 인물입니다. '족장의 사상을 깊이 검토'할려고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고, 족장이 만든 작품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여러 각도에서 고찰하지도 않고, 유교수와 같은 원로 평론가가 미당을 성급하게 "인용부호 빠진 이 나라 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 내지 "단군이래 최대의 시인"이라 극찬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일제강점기의 미당의 친일행각과 해방 후의 지속적인 독재정권 찬양행위를 무시한 채, 미당을 시인부락의 족장으로 앉힌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각주3). 명실상부한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기에는 미당에겐 참다운 족장의 덕목--삶에 대한 통찰력, 준엄한 자기비판, 냉철한 이성, 역사의식, 미래에 대한 비전, 희생정신 등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은, 비판정신과 역사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에, '종천순일(從天順日)의 정신'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주군을 섬기는 '백성의 멘탈리티' 내지 주인을 섬기는 '종의 멘탈리티'를 보입니다.
1988년에 발간된 {팔할이 바람}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從天順日派?]란 시에서, 미당은 회고하길, 일제강점기에 자신이 친일행위를 한 것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일본의 패망을 상상하지 못한 탓에 일본의 장기 지배 속에서 호구 연명할 길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어서 한 행위였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각주4). 또한 그는 자신의 친일행적을, "이조 사람들이 그들의 백자에다 하늘을 담아 배우듯이 하늘의 그 무한포용을 배우고 살려 했을 뿐"이고, "지상이 풍겨 올리는 온갖 美醜를 하늘이 <괜찮다>고 다 받아들이듯 그렇게 체념하고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친일파' 내지 '부일파(附日)'라고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스스로를 '從天順日派'로 칭하였습니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
미당이 자신을 종천순일파로 칭한 저의는 스스로의 친일행위를 '하늘'의 뜻을 따른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일제 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 했던 많은 국민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였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명칭은 미당의 삶 전반을 통해 지속되어온 그의 독특한 인생관 내지 세계관을 가장 잘 정의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제 생각에도, 미당을 '친일파'라 칭하기보다는 '종천순일파'라 칭하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친일파'라 칭할 경우, 그가 섬긴 '하늘'이 일왕과 아마테라스에 국한되기 쉽고, '섬김받는 자'와 '섬기는 자' 사이의 수직적 관계가 부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제시대에 국화꽃으로 상징될 수 있는 히로히토왕과 아마테라스를 하늘과 태양으로 떠받들어 섬겼듯이, 해방 이후에도 여러 다른 '하늘'(天)과 '태양'(日)을 섬기고 따랐습니다. <국화꽃의 비밀4>에서 말씀드렸듯이, 미당은 이승만을 만나기도 전부터 그를 "하늘의 서자 환웅의 아드님-단군" 내지 "제우스만큼은 천둥소리 나게 하는 눈살과 이맛살"을 가진 하늘같은 존재로 생각하였습니다(각주5). 그 이후로도 이승만을 향한 미당의 존경은 '숭배' 내지 '짝사랑'으로 그 스스로 표현할 정도로 맹목적인 것이었습니다 (각주6). 즉 미당에겐 이승만은 '국부'이며 '한국혼'이고, 단군과 제우스에 필적할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미당의 '하늘' 내지 '주군'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은 이승만에게만 보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당은 1987년에 쓴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란 시에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이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전두환에 대해 '새로운 햇빛'과 '하늘의 찬양'이란 거창한 표현을 쓰면서, 마치 그가 단군이나 아마테라스에 필적하는 초월적 존재이기나 하듯,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으로 찬양하였습니다(각주7).
이러한 그의 종천순일파적인 인생관은 그의 일부 작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전 작품에 팽배해 있는 것이 그의 현실순응주의 내지 패배주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방 이후엔 민족주의의 옷--신라정신, 풍류, 영원성, 영통, 혼교, 환웅, 웅녀, 단군 등등--으로 재빨리 갈아입고 나타나기 때문에 텍스트의 표면구조 속에서는 쉽게 간파되지 않습니다. 유종호 교수가 '전통 창제' 내지 '독자적인 신라정신의 구축'으로 평가한 {신라초}나 미당이 '득도의 경지'에 이르러서 썼다고 극찬한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그리고 그의 수필에 나타난 '신라정신,' '풍류도' '영원성' 등은 그의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 인생관의 변형일 가능성이 큽니다. 미당은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에 수록된 <神市와 仙境>에서 풍류를 "살을 가진 사람의 한정된 목숨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한정 없는 하늘 속의 마음만의 나이로 사는" 신선의 길로 정의하고 있는 데, 이는 최남선의 풍류사상에 영향이 받아 내린 정의입니다. <風流>란 시에는 최남선의 풍류사상을, <한국적 전통성의 근원>이라는 글에선 최남선의 무속이론을 소개합니다 ({서정주문학전집2}299). 즉, 미당의 단군사상 내지 신라사상의 근간이 되는 것이 최남선의 <불함문화론> 내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남선의 사상을 연구한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육당의 단군연구라는 것이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의 바탕이 된 <내선일체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며, 육당이 삼국의 신라시대의 화랑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은 "풍류"라는 것은 "조선신도(朝鮮神道)"에 불과하고, 화랑도는 무사도의 한 변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각주8).
미당은 신라에 관해 쓴 여러 편의 시와 수필에서, '처용(處容)'이나 '검군(劍君)'과 같이 현실도피적 내지 체제순응적인 자세로 인생을 산 숙명론자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한 현실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수동적으로 감내한 신라인들을, 풍류도를 아는 '영원인'으로 거듭 부각시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암 조광조론>에선, 체제개혁적인 지조있는 선비 조광조를 풍류를 모르는 졸장부로 부각시키면서 우스개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당의 종천순일의 정신은 그의 초기 작품 뿐만 아니라 말기의 작품에서도 무수히 발견됩니다. 여기에선 구체적인 예로, <처용의 춤>이라는 그의 글을 간략히 소개드리겠습니다. <처용의 춤>은 소위 그가 말하는 신라인의 풍류도 내지 영원인을 기린 산문입니다. <처용(處容)의 춤>에서 미당은 자신의 아내를 탐한 마귀를 향해 보인 처용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신라 서울 경주에 달이 밝은 날 밤에, <처용>이란 이름의 사내는 밤깊도록 딴 데에서 놀다가 이슥해서 집에 들어와 제 침실의 잠자리를 본다. 그런데, 그 자리에 보이는 것은 아내의 두 다리뿐이 아니라, 딴 샛사내의 두 개를 더해서 다리가 네개가 있었다. 그래 '그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웬 놈거냐'고 한다. 그러나, 신라왕조의 고급관리였던 사내는 長劍도 쓸 만한 걸로 한 자루쯤은 가졌었을 테지만, 성급한 <오델로>처럼 그걸 뽑는 일은 하지 않았음은 물론, 별다른 욕지거리 한 마디도 퍼부어 대는 일도 없이, 다만 '본래는 내것이었지만 빼앗은 걸 어찌 하리꼬'하고, 빼앗겼으니 그만 할 수 없는 일이라고만 하고 있다 (......)
그리고 이 두 길 [오델로의 길과 처용의 길] 중에 <처용>의 珍客 歡迎의 길을 차라리 가리킨 건 물론 고대 인도의 석가모니다. 어차피 오기로 되어 있는 진객(珍客)을 칼 뽑아 대항하거나 피해 봤댔자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측 출혈만 심할 바에야 흥분 고스란히 가라앉히고 그냥 좋게 맞이해 대접해서 보내자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이 빤한 교훈은 그대로 인류의 정신사상 최상의 것이 된다 (각주9).
여기에서 미당은 처용의 패배주의를 석가모니의 지혜로 미화시키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처용과 석가모니의 지혜를 빙자해서 자신의 종천순일적 인생관을 정당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당이 자주 쓰는 수법 중의 하나가,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끌어드리는 것입니다. <從天順日派?>란 시에서, 적극적으로 친일행각을 일삼았던 자신을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무수한 조선인들과 같은 부류에 넣은 것처럼, 그는 자신의 철저한 현실순응주의 내지 패배주의를 지혜로 포장하기 위해 그 근거를 신라인들과 석가모니에게서 끌어오는 수법을 종종 씁니다. 그가 특히 석가모니가 가르쳐 준 지혜로 최대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석가모니가 죽음에 처해서 보인 독살자(毒殺者) <춘다>에게 베푼 관용성입니다. <석가모니에게서 배운 것>({미당 산문})이란 글을 보면, 미당은 석가모니의 죽음에 관한 무수한 해석 가운데 아직 정설로 인정되지 않는 '<춘다>에 의한 독살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합니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이 중에 한 사람은 나를 팔았다"라고 지시해서 가롯 유다를 목매달아 죽게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석가모니는 독살을 당하면서도 춘다를 고발하지 않았다는 점을 미당은 가장 높이 삽니다. 즉, 자신의 종천순일적 인생관--'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에 석가모니적 지혜의 옷을 입히고 자신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소인배로 부각시키는 것이 그의 왜곡된 불교정신의 핵심 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삶과 글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요술사적 재능을 지닌 미당이 자가당착적인 일면을 극명히 노출시킨 것은 그의 보들레르 인용입니다. 그는 <문학작품과 독자>라는 글에서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 내지 '민중문학 운동'을 비판하면서, 뛰어난 예술가의 본보기로 보들레르를 내세웁니다.
샤를르 보들레르도 프랑스 혁명 때에는 다수 민중의 편이 되어 그 시가전의 전위대열에도 참가했으며, 또 그들의 신문 발간에까지도 앞장서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시집 <악의 꽃>이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을 통독해 보라. 거기 어디에 다수의 군중심리에 아첨하여 인기를 얻으려 한 작품이 단 한편인들 보이는가? 거기에는 시의 발견 노력자 보들레르 개인의 구전(俱全)의 자유와, 정밀한 심미탐구와 그래서 도달한 상징적 표현의 선각자로서의 면면한 창작노력의 흔적들만이 역연할 따름이다.
미당은 보들레르의 삶과 예술을 다 알면서도, 보들레르가 걸어온 삶의 진정성과 순수성에 대해선 눈뜬 장님이 되고, 오로지 그의 기법만을 배웠을 따름입니다. 석가모니의 참다운 지혜, 보들레르의 참다운 순수성에는 눈을 감은 채, 그에게 유리한 일면 만을 보았다고나 할까요? 자신의 나이 20대에 쓴 <자화상>에서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라고 선언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삶을 준엄한 자기비판 없이 철저한 순응주의로 일관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평생을 종천순일적 인생관에 충실하게 현실순응적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은밀한 형태로 작품 속에 담아 우리의 민족혼을 어지럽혀 온 미당을, 그의 빈곤한 사상에 대한 충분한 연구도 하지 않고 또 공개적인 논쟁의 장도 제대로 펼쳐보지 않고, 그에게 서둘러 "20세기 최대의 시인"이란 월계관을 씌우고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을 제정한다는 것은 너무도 졸속으로 내려진 위험스런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족방언의 요술사'라 평가될 정도로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닌 자가 '시인부락의 족장'으로 섬겨질 때, 그 '요술사-족장'의 종천순일파적 사상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너무도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전세계인들이 알고 있는 "황국(黃菊)=일본황실"이라는 등식을 일제 강점기를 체험하고 {국화와 칼}을 읽었던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간과해 온 것은 미당이란 '부족 방언의 요술사'가 보인 마술적인 힘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당의 <국화 옆에서>의 황국과 거울을 "국화꽃=친근한 누님" 내지 "거울=관조의 경지"로만 획일적으로 해석해 온 것도 모두 단순한 표피 아래 자신의 비밀스런 생각을 은폐해 온 흑색 마술사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이 땅의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미당의 마술사 내지 요술사 능력에 매혹당해, 혹은 미당의 실체를 알면서도 자신들 패거리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아직도 미당의 빈곤한 사상과 볼품없는 실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많은 평론가들과 어른들은 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에 등장하는 어른들처럼 벌거벗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하길 주저하고,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들이 보지도 못하는 화려한 겉옷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니까 한 아이가 말하더군요. 안데르센 동화 속의 순진한 아이처럼, "하지만 임금님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걸요"라고.
저는 제 길고 긴 논문의 맺음말로, <간디학교>를 다니는 문학평론가 지망생인 그 아이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그 학생은 대학입시를 위해 모 대학의 집단면접에 응시했다가 미당 서정주에 대해 평가하라는 교수들의 질문을 받았다더군요. 그 아이는 수많은 지원자들 가운데서 자신 홀로 올바른 답을 말했기 때문에 당연히 시험에 붙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 데, 의외로 떨어져서 실망이 커 보였습니다. 그 아이가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머뭇거리듯 천천히 또박또박 한 말은 아직도 내 마음에 아프게 와 닿습니다.
"미당 서정주의 친일시를 접하고,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보면서 ...... 자기 사상의 뿌리가 썩어 있는 데 ...... 그 작가의 작품이 아름답다고,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이라고 해서, 그 꽃이 진짜 진실된 꽃일까요?"
그동안 제 길고 긴 논문을 참을성있게 읽어주신
여러 창비네티즌들께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창비웹팀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각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동아일보] 2000-12-27.
2) 박철희 편, {서정주} 182.
3) 한수영, [미당의 친일시와 해방 이후의 활동: 서정주(徐廷柱 1915~)], {청산하지 못한 역사}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 265-279. 김병걸·김규동 편, [서정주 (達城靜雄)],{친일문학작품선집2} (실천문학사, 1986) 271-313.
4) {미당시전집3} (민음사, 2001) 208-211쪽
5) {서정주 문학전집5} 71
6) [이승만 박사의 곁], [짝사랑의 역정], {미당 자서전2} (민음사, 1994)
7)[서정주--친일시인으로 정치문인으로], {친일파 99인} http://banmin.or.kr/n_pds/chinilpa99/99frame.htm
8) 최석영, {일제하 무속론과 식민지권력}, 서경문화사, 1999, 51쪽.
박성수,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친일파99인}. 각주7)의 사이트에서 참조.
9) {서정주 문학전집4}40쪽
-----------<2001년 7월3일, 창비자유게시판에서 펌, >-------------------
미당에겐 귀촉도=두견=소쩍새
혹시나 네티즌들의 참고자료가 될까 싶어
미당 자신이 <귀촉도>란 시에 직접 붙인 주석을 옮겨 적어봅니다.
"귀촉도는, 행용 우리들이 두견이라고도 하고 솟작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귀촉도... 그런 발음으로서 우는 것이라고 地下에 도라간 우리들의 祖上의 때부터 들어온 데서 생긴 말슴이니라." ({미당시전집1})
------------------<<2001년 7월3일, 창비 자유게시판에서펌, <끝>>--------------
위 글에 대한 백낙청교수의 글(펌 창비게시판)
[글쓴이 IP : 61.73.7.160] 글쓴이 백낙청 추천수 30 등록일 2001년 07월 17일
제목 창비무명인님의 <국화꽃의 비밀>을 읽고
창비무명인님이 <국화꽃의 비밀>을 창비게시판에 연재하기 시작하신 것이 지난 6월 24일이었지요. 열심히 따라 읽으면서 도중에라도 한마디 격려와 논평을 보태고 싶은 충동을 여러번 느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 평해달라는 저자의 부탁도 있었거니와, 읽어가면서 인터넷 특유의 쌍방향성과 예측불능의 변화가 섞여드는 걸 보고 더욱이나 조용히 지켜보기로 작정했지요.
그런데 정작 연재가 끝난 싯점부터 한동안은 도저히 글을 쓸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2주가 훌쩍 지나갔고, 게시판의 관심사는 벌써 창비무명인님의 글에서 꽤나 멀어진 느낌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애초에 마음먹었던 대로 몇자 적고 싶은 의욕이 여전하고 일종의 의무감마저 느껴지는군요. 다행히 연재됐던 글들이 '자게 추천글방'에 올라 있으니 굳이 새로 퍼올 것 없이 그냥 생각나는 바를 적겠습니다.
의무감까지 느끼는 것은 창비무명인님(이하 '님'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합니다)의 글이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본격적 미당론의 전개에 중요한 이바지였을 뿐 아니라 창비게시판에 모처럼 자유게시판다운 즐거움과 보람을 한껏 선사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정성들여 쓴 평문을 이곳에 올려주신 것만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지만, 게시판 연재라는 형식을 택함으로써 다른 방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동감 넘치는 발표가 되었고 어떤 의미로는 집필과 발표의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게 된 것이지요. 원래는 님께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방법인지 모르나 싸이버공간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확대하는 망외의 성과로서 많은 네티즌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주셨다고 믿습니다.
미당이 작고하고 미당담론이 가열되기 시작할 때부터 저도 한번 끼여들고 싶다는 욕구를 언뜻언뜻 비치곤 했지요. 그러나 본격적인 미당론을 쓸 처지는 못 되고, 창비무명인님의 글을 읽은 독후감 삼아 몇가지 단편적인 생각을 피력하는 일이 지금 제 형편으로는 고작입니다. 그 점에서도 님께 감사할 일이지요.
창비무명인님의 진지한 자세와 폭넓은 자료섭렵, 선행연구자들에 대한 기탄없는 비판 등은 이미 여러 독자들이 칭송한 바 있으니 제가 더이상의 찬사를 보탤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보다는 "미당이 '부족방언의 마술사'라고 해서 '시인부락의 족장'이라는 월계관을 씌우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연재 4회, 6/27)라는 님의 주장(이며 결론)에 저도 충심으로 동의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어를 능수능난하게 다룬 시인의 재능과 업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만으로 최고의 시인에게나 돌릴 영예를 인정해주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겠지요.
그런데 기왕에 '마술사' 또는 '요술사' 얘기가 났으니 그 말뜻에 대해서도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님은 "한 부족의 구성원이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마술사 내지 요술사를 그 부족의 '우두머리'로 뽑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 마술사가 줏대가 없는 기회주의자인 경우엔 더욱 그러하지요"(같은 곳)라고 하셨는데, '줏대없는 기회주의자'가 족장 자격이 는 건 당연하지만, '마술사 내지 요술사'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우두머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주장을 펴려면 '언어의 마술사'라는 말을 좀더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겠지요. 우리는 일반사회에서의 요술쟁이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시인부락'에 국한해서 '부족방언의 마술사'를 논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미당 서정주에 대한 이러한 결론이 나오기까지 창비무명인님께서 공들여 수행하신 '국화 옆에서'의 새로운 해석에 대해 몇마디 해보지요.
이 해석은 제가 아는한 확실히 새로운 해석이며, 작품에 대해 적어도 저 자신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가지를 생각케 해준 값진 비평입니다. 그러나 저의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국화꽃=천황+천조대신'이라는 논지를 입증하는 데 성공하신 것 같지는 않아요.
무엇보다도, "<국화 옆에서>의 창작시점과 천황의 인간선언 시점이 다같이 1946년 무렵인 데다, 인간선언 후 현인신에서 평범인으로 돌아온 히로히토왕의 이미지와 4연에 묘사된 늦가을 무서리 속에 피어있는 국화꽃의 이미지가 많이 유사하다"(8회, 7/2)라는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 시기에 현인신(現人神)의 몰락을 동정하며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은 님 스스로 강조하신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서정주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해방이 된 뒤에도 일황에 대한 충성심과 애착을 간지한 채 이런 시를 쓸 정도라면 오히려 '역천친일파(逆天親日派)'요 (제 주변의 어느 분 표현대로) 일종의 친일지사(親日志士)가 아니겠습니까. (해방전 창작설로 돌아가더라도 역시 비슷한 문제에 부딪칠 것 같아요.)
황국이 일본 황실의 상징이라는 사실이 '국화 옆에서'를 읽는 대다수 한국 독자들에게 큰 의미를 갖기 어렵다는 (김흥년님 등 몇분의) 지적은 그 자체로서 님의 논지를 뒤집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천황(또는 천황+천조대신)의 상징으로서의 황국을 다룬 '부족방언의 마술'이 마술로서 제대로 먹혀들지 않고 있다는 지적으로서는 설득력을 갖지 싶네요.
그런데 황국이 곧 천황이요 '국화 옆에서'가 곧바로 천황 또는 천조대신을 노래한 시라고 주장하는 대신, 일본의 신화나 전설의 깊은 영향이 시인의 상상력과 감수성 속에 (십중팔구 무반성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쪽으로 논지를 완화한다면 훨씬 그럴법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 경우에도, "왜 학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성장한 미당의 시들을 일본문화와 연계시켜 읽을려는 시도를 그동안 하지 않은 것일까? 지난 50년 간의 우리의 학문적 풍토라는 것이 일본의 문화적 상징과 신화들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할 정도로 폐쇄적이었던 말인가?"(3회분 보론, 6/26)라는 또하나의 심각한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할 것입니다.
미당시의 이런 측면에 대한 지적은 미당의 감수성 전반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국화 옆에서'를 제대로 감상 또는 비판하는 데도 빼놓을 수 없을 듯합니다. 이 시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든 친일시로서 경계하는 창비무명인님 같은 분에게든, 작품의 가장 특징적인 대목은 '내 누님 같은 꽃'이 나오는 제3연일 거예요. 그리고 이 국화는, 님이 인용하신 이어령교수가 지적했듯이, 동양의 전통적 사군자(四君子) 가운데 하나이며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상징으로서의 국화와는 많이 다른 성격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문학독자로서 따질 문제는, 달라서 어떻게 됐나는 것입니다. 이어령교수의 판단처럼 시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느냐 아니면 1, 2연 및 4연의 흐름에서도 벗어나면서 시적 효과를 손상하고 있느냐는 거지요. 님은 딱히 후자의 주장을 펼친 것 같지는 않고, 시의 '요술'이 성공하긴 하는데 친일정서에 물든 '흑색 요술'이라는 입장이시라는 인상입니다. 제가 바로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저 자신은 제3연이 특징적인 건 분명하지만 작품상의 결함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연전에 어느 글에 쓴 적이 있습니다만, 그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사춘기적 정서가 다분히 남은" 대목이라 생각되거든요. 그에 비한다면 제가 그때 거론하던 고재종(高在鍾) 시인의 '고절'은 "그런 감정의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는 농군의 시요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오상고절'을 표상한 국화시"로서 오히려 한 수 위라고 평가했던 것이지요(민음사 간 <한국 현대문학 50년>에 실린 졸고 '"통일시대"의 한국문학' 중 627-8면 참조).
미당 자신은 나이 들면서 비로소 40대 여인의 미를 제대로 알아보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지만, 소복 입은 연상의 여인에게 느끼는 묘한 끌림은 사춘기에 흔히 있음직한 감정이며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바로 이런 사춘기적 정서에 대한 호소가 '국화 옆에서' 이 대목이 많은 독자에게 행사하는 매력의 일부가 아닌가 합니다. 물론 그게 전부란 말은 아니고요. 저자가 이 정일(靜溢)한 여인과 자신을 은근히 동일시하면서 독자도 함께 끌고 들어가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 (님은 "적지 않은 학자들이 국화꽃을 파란만장한 삶을 거친 후 관조의 단계에 이른 40대의 시인 서정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국화 옆에서>의 발표 시점(1947)과 <서정주시선>에 수록된 시점(1956)을 혼돈한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광용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서정주가 이 시를 발간한 때는 32세였으므로, 40대의 중년여인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그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나이는 46세였습니다"(5회, 6/29)라고 하셨습니다만, 30대초의 별로 정일하지 않은 남자로 살면서도 40대의 여인과 자신을 얼마든지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 미당 특유의 요술이자 다분히 상습화된 자기미화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창비무명인님의 자세한 논의를 읽으면서 '국화 옆에서' 제3연에 대해 제가 막연히 느끼던 불만을 좀더 정밀히 규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에 대한 저의 전체적 평가를 말씀드린다면, 각 연이 모두 그나름의 요술을 행사하고 있지만 3연에 끼여드는 독특한 정서--그것이 사춘기적인 것이든 일본문화친연적인 것이든--첫행부터 마지막행까지 빈틈없이 연결되는 요술에는 미달한다는 것이에요. 요술사로서도 허점을 보인다는 거지요.
사실 저는 '부족방언의 마술사' 또는 '요술사'라고 할 때에 그 말 자체를 나쁜 뜻으로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마술사이므로 곧 족장이 될 수 없다고 말할 건 아니라는 거지요. 어찌 보면 시인이면 누구나 자기나라 말의 마술사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족장은 그들 중에서 요술도 제일 잘하려니와 그 요술이 부족에게 해를 끼치는 '흑색 요술'이 아닌 사람이 맡을 일이겠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면 시인 중에서도 언어적인 기교기 특히 돋보이며 유려하고 거침없는 가락을 지닌 시인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정주는 한국시의 탁월한 마술사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한정된 의미로도 과연 서정주가 고은보다 뛰어난 마술사인지는 한번 작심하고 따져볼 문제지요.) 반면에 이산(怡山) 김광섭(金珖燮) 같은 시인은 그의 '겨울날'이나 '산'이 도달한 시적 경지가 미당이 쉽게 흉내내기 힘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눌변의 인상을 풍기는 것이 그의 시인적 개성이기 때문에, 마술사라는 호칭이 별로 따르지 않습니다. 즉 이런 제한된 의미의 '마술사'는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는 데 필수조건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제사유도 아닌 거
지요.
미당이 '족장' 자격이 없다는 창비무명인님의 결론에 동의하면서, 마술사로서는 어떤 등급의 마술사인지도 작품을 위주로 가려내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동시에 그의 마술이 흑색 마술인지 백색 마술인지도--우리가 너무 흑백논리에 빠지지만 않는다면--작품을 근거로 가려봐야겠지요. '국화 옆에서'에 대한 님의 해석과는 의견을 달리하는 바도 있었습니다만, 그 요술이 '흑색 요술'임을 강조하신 논의를 어쨌든 시의 내용을 토대로 전개하신
점은 이번 논문의 또 한가지 미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당시에 대한 저의 전체적인 평가를 말하려면 좀더 긴 시기에 걸친 더 많은 작품을 언급해야겠지요. 지금으로서는 <미당시전집>에는 '국화 옆에서'보다 못한 시도 수두룩하지만 '국화 옆에서'가 결코 미당시의 최고 경지를 대표하는 작품도 아니라는 저의 생각을 알리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에 관해 일간 한번쯤 더 쓰겠습니다.
01/7/17 백낙청 드림
-----------------(2001년 7월 17일, 창비게시판)---------------------
다음은 백낙청교수의 글을 읽은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글쓴이 IP : 211.179.78.188] 글쓴이 펌 동아 추천수 0 등록일 2001년 07월 20일
제목 백교수님 동아에 미당비판?-사실은 이래요
[문학예술]백낙청교수 미당비판 가세…'창비' 홈페이지서
백낙청교수 계간 ‘창작과 비평’을 이끌고 있는 백낙청(63) 서울대 영문과 교수가 ‘미당 비판론’에 가담하고 나섰다.
백 교수는 17일 ‘창작과 비평’ 홈페이지(www.changbi.com) 자유게시판에 올린 ‘창비무명인님의 국화꽃의 비밀을 읽고’라는 장문을 글을 통해 미당 서정주 시인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백 교수의 글은 ‘창비무명인’이란 아이디를 가진 네티즌이 6월24일부터 8차례에 걸쳐 올린 미당 비판론을 뒤늦게 격려하는 논평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글에서 백 교수는 “미당이 ‘부족방언의 마술사’라고 해서 시인부락의 족장이라는 월계관을 씌우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님의 주장에 충심으로 동의한다”면서 미당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즉, 미당이 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룬 재능은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 최고 시인의 영예를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요지다.
이어서 미당의 대표시로 알려진 ‘국화 옆에서’를 언급하며 “일본의 신화와 전설의 깊은 영향이 시인의 상상력과 감수성에 무반성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시에서 묘사된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의 표상’(문학평론가 이어령)으로 보기 힘들며, 이런 점에서는 오히려 고재종 시인의 ‘고절’이 한 수 위라고 평했다.
특히 이 시중 ‘내 누님 같은 꽃’이 나오는 제3연을 지적하며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사춘기적 정서가 다분히 남은 대목”이라며 흠을 잡고 “30대초의 별로 정일하지 않은 남자로 살면서 40대 여인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 미당 특유의 요술이자 다분히 상습화된 자기미화가 아니겠는가” 반문했다.
백 교수는 글 말미에서 “미당은 탁월한 마술사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는 점을 재차 언급하면서도 “과연 서정주가 고은보다 뛰어난 마술사인지는 한번 작심하고 따져볼 문제”라면서 최초에 ‘미당 비판론’을 제기했던 고은씨에 대한 애정을 내비쳤다.
그는 아울러 “미당이 마술사로서는 어떤 등급의 마술사인지 작품을 위주로 가려내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면서 “동시에 그의 마술의 부족에게 해를 끼치는 흑색마술인지 백색마술인지 가려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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