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22(토) 08:42 (MSIE6.0) 218.155.187.63 1024x768
편운 조병화  

편운 조병화 선생께서 2003년 3월 8일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제게 시인 자격증을 주신 분이지요. 선생의 면을 기리는 기사들을 여기 모아둡니다.
----------------------------------------------------------
*2003.3.9. 원로시인 조병화씨 타계 (2003.03.09)

 
한국문인협회 이사장과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역임한 원로 시인 편운(片雲) 조병화(趙炳華)씨가 8일 오후 8시 55분 경희의료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조씨는 지난 1월 8일 심장질환과 당뇨증상으로 경희의료원에 입원했다가 병세가 악화돼 지난달 25일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아왔다.

경기도 안성 출신인 조씨는 경성사범학교와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를 나와 경성사범, 인천 제물포고, 서울고 교사를 거쳐 경희대, 인하대 교수를 역임했다.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등단한 뒤 지금까지 창작시집 52권, 시선집 28권, 시론집 5권, 화집 5권, 수필집 37권, 번역서 2권, 시 이론서 3권 등 160여권의 책을 냈다.

그의 시는 인간의 숙명적 허무와 고독을 쉽고도 아름다운 시어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의 시 ’난(蘭)’이 지난 2000년 일본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실렸으며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 외국어로 번역된 시집도 25권에 이른다.

화가로 활동하면서 20여 차례의 개인전과 초대전 등을 갖기도 했다.

문단에 기여한 공로로 아시아문학상(1957), 서울시 문화상(1981), 대한민국예술원상(1985), 3.1문화상(1990), 금관문화훈장(1996), 5.16민족상(1997) 등을 수상했다. 후배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1991년 편운문학상을 제정, 지난해까지 36명의 시인, 평론가에게 시상했다. 유족은 장남 진형(眞衡.세종대 대학원장), 장녀 원(媛.의사), 차녀 양(洋.바이올리니스트), 삼녀 영(泳.서양화가)씨 등 1남3녀.

빈소는 경희의료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2일 오전 9시. 고인의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장지는 고향인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선영. ☎ 958-9545.

(서울=연합뉴스)
------------------------------------------------------
[조병화 시인의 삶과 문학]  (2003.03.09)

 

“콘크리트 같은 적막 속을/고독이 전율처럼 지나갑니다./무료한 시간이 무섭게 흘러갑니다./시간의 적막 속에서/속수무책, 온몸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아, 이 공포,/콘크리트 같은 적막 속을/고독이 전율처럼 머물고 있습니다.”
8일 작고한 조병화 시인은 최근 출간한 「편운재에서 보낸 편지」(문학수첩刊)제3권의 마지막 서신에서 죽음을 예감한 노시인의 회한과 고독을 한 편의 시를 통해절절하게 드러냈다. 조 시인은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산호장刊)으로 등단한 뒤 지난해5월 출간한 「남은 세월의 이삭」(동문선刊)까지 모두 52권의 창작시집을 발표했다.

시선집과 수필집 등을 합치면 등단 후 50여년간 발표한 책이 160여권에 이른다. 3년 전 서울대 인문정보연구소가 1895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문학 100년을 CD롬으로 자료화한 결과, 조 시인이 해방 이후 가장 많은 시집을 낸 것으로 조사됐다.

조 시인은 조사기간에 시선집을 포함, 모두 88권의 시집을 냈다. 2위인 고 은 시인의 38권, 3위 김남조 시인의 34권을 월등히 앞선다.

그의 이같은 다산성(多産性)은 그의 시가 일상 속에서 말하듯, 편지 쓰듯 쉽고편하게 쓰여진다는 데서 연유한다. 시인 스스로도 생전에 “내면의 소리가 날숨처럼나왔다”면서 마치 숨쉬듯 시를 써왔다고 자주 밝혔다.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를 나와 한때 고교에서 물리교사를 했던 조 시인은 당시척박했던 교육환경을 안타까워하며 “다시 태어나면 자연과학도의 꿈을 이루겠다”고말하곤 했다. 1955년 발표한 다섯번째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정음사刊)는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뒀으며, 이후 국내 출판계에 연시풍 시집의 베스트셀러 진입 전통을 세웠다.

그는 인간의 실존적 삶을 다룬 순수시만을 일관되게 써왔다. 이로 인해 격동기를 살아온 시인으로서 민족문제나 역사성을 지나치게 외면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의 이같은 성향을 두고 시인 김수영은 “넌 부르주아, 난 프롤레타리아”라고 빈정거리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씨는 “말하듯, 편지하듯 씌어진 것이 조병화 시의 형태적 특징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나날의 삶 속에서 숱하게 겪는 극히 통상적인 정감 경험의토로가 시의 내용을 이룬다”면서 “그의 시에 나타난 고독은 몸서리치도록 처절하거나 다스릴 수 없는 폭동과 같은 것이 아니라 순치와 애무가 가능하며, 적당히 귀엽기까지 하다”고 평했다.

문학평론가 김재홍씨는 “그의 시가 한 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수십년간 생명력을 이어온 것은 그의 시가 인생이라는 크고 어려운 주제를 탐구하면서도 그것을 평이한 비유와 소박한 어법으로 노래하기 때문”이라면서 “그의 시는 사랑, 이별과애수, 긍정과 달관, 어머니와 고향, 갈망과 보헤미안, 인간애, 고독과 허무의 시 등으로 요약되며 인간주의, 낭만주의, 순응주의, 영원주의에 정신적 기반을 두고 있다”고 평했다.

조 시인은 시인협회 회장, 문인협회 이사장, 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했고, 세계시인대회에서 계관시인으로 추대되는 등 명예를 누렸다.

빈소를 찾은 이근배(시인협회 회장) 시인은 “고인은 덕성과 친화력으로 문단을 이끌었으며, 문학상과 문학관을 미리 준비하는 등 문인으로서 하실 일을 생전에 차곡차곡 챙겨놓고 가셨다”며 애도했다.

조 시인은 팔순을 맞아 펴낸 쉰번째 시집 「고요한 귀향」(시와시학사刊)에 실린 ’꿈의 귀향’에서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라고 묘비명을 써놓았다.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발자취] 조병화씨/ 허무와 고독과 마주했던 한평생  (2003.03.09)




한국문인협회 이사장과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을 지낸 조병화 (趙炳華·82) 시인이 자신의 호(號) ‘한 조각 구름(片雲)’처럼, 지난 8일 저세상으로 갔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낸 허영자 교수는 “푸른 하늘을 유유히 떠가는 하얀 구름처럼 멀고 아득한 곳에 뜻을 두시고 그러면서도 가장 따뜻하게 삶을 경영하는 인품”을 기린 바 있다. 문단에서 그는 언제나 너그러운 웃음을 띤 반듯한 신사였다. ‘목마와 숙녀’를 쓴 박인환과 더불어 그의 파이프 담배는 유명하다. 특히 지긋하게 눌러쓴 도리우찌(사냥모자)는 그의 오랜 멋으로 굳어져 있다.

그가 마지막 남긴 책은 지난 1월 말 나온 ‘편운재에서의 편지’(문학수첩 펴냄)다. 그는 시집, 시선집, 시론집, 수필집 등 160여권의 책을 남길 만큼 정열적인 집필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책에는 인생을 정리하는 듯한 심회가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었다. ‘웬일인지 요즘 나는 기운이 없고, 식욕까지 잃고, 매사가 힘이 들고, 귀찮고, 그저 하는 일 없이 오전이 가고, 오후가 가고, 하루가 지나갑니다.’(244쪽)

마치 최후의 작별인사를 한 듯했다. 그는 병간을 해온 간호사들에게 이 책을 주고 싶어했고, 문학수첩 출판사의 주간인 김종철 시인에게도 하루속히 출판이 되도록 종용했었다.

그는 시집(詩集)에 대해 ‘시의 집(宅)’이란 생각도 갖고 있었다. 48번째 시집 ‘기다림은 아련히’(1998년)의 표지에는 ‘제48 (塾)’이라 쓰여 있다. “내게 시란 ‘영혼의 숙소’라는 뜻이에요. 나를 찾아와 머물다 떠나는 영혼을 그때그때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시를 써왔어요.”

조병화 시인은 자유로운 삶의 응시, 인생이라는 흐름 속에 솟구치는 죽음·허무·고독 같은 주제와 늘 대면했다. 부인을 1998년에 먼저 보내고 이듬해 낸 ‘시와 그림’이라는 시화집에는 아내 없이 긴긴밤을 홀로 보내야 하는 노구(老軀)의 심사가 어려있다. ‘겨울 밤은 길기도 하여라/ 아내가 던지고 간 이별처럼’(‘겨울밤’ 전문). 이 구절에 대해 그는 “여편네와 원만하지 못했어. 그런데 작년에 먼저 갔지”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는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를 그린 것이야. 그래서 자유분방하지. 나는 시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시를 살고 있어. 그래서 나는 마르지 않지.”

그는 젊었을 때 경성사범학교·제물포고·서울고 교사를 지냈으며, 후에는 경희대·인하대·중앙대 교수, 대학원장, 이사 등으로 교직과 인연을 가졌다. 그는 광복 직후 대한럭비축구협회 이사를 지내는 등 평생을 럭비와 각별한 사이로 지냈다.

그의 시는 국내 교과서에 여러 편 실렸을 뿐 아니라, 시 ‘난(蘭)’은 일본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번역돼 실리기도 했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시인’으로서 ‘인간의 운명과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였다는 보편성 덕분에 그의 시는 영어·불어·독어·중국어·일어 등 외국어로 번역된 시집만 25권에 이른다.

독자가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작품은 고교 국어교과서도 실렸던 ‘의자(椅子)’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의자7’ 중). ‘의자’ 연작에 대해 문학평론가 최동호 교수(고려대)는 “그의 시에서 의자는 일상적이며 기능적인 의자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무대이며 터전이다”고 말하고 있다.

조병화 시인은 시계간지 ‘시로 여는 세상’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작년 봄 창간호) 결과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생존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金侊日기자 kikim@chosun.com )



---------------------------------------------------
*2003/03/10 동아일보
[삶과 문화]마지막 로맨티스트 조병화

편운 조병화(片雲 趙炳華·82) 시인이 8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시단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문학평론가 김재홍)가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 부재의 공간에서 선후배 및 동료 문인들은 기억의 자락에 새겨진 고인의 모습을 추억할 뿐이다.


허영자 시인(65)은 “한국의 가장 낭만적인 서정시인”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퍼내도 퍼내도 넘치는 샘물과 같았어요. 평생 시를 쓰셨던 그 풍요로운 감수성을 늘 부러워했지요.”


제자인 시인 정호승씨(53)는 “시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늘 말씀해 주셨다”며 “시를 공부하는 제자들에게 얼마나 살갑게 대해 주셨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쉽고 아름다운 시어로 삶을 노래한 편운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평단 일부에선 철학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시인 이성부씨(60)는 “‘쉬운 언어로도 일상을 사색적으로 또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난해해야만 철학이냐’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얘기했다.


편운의 면면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의 ‘부지런함’과 ‘검소함’을 잊지 못한다.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시인이면서도 그의 생활은 빈틈없고 규범적이었다. 파이프 담배와 베레모로 기억되는 멋쟁이 편운의 ‘포켓치프’는 낡은 머플러의 귀퉁이를 잘라 만든 것이었다.


오세영 교수(61·서울대)는 시계처럼 정확했던 편운의 일상을 회상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나서 그날 할 일을 정리한 뒤 오전 6시면 혜화동 사무실에 나와 계셨죠. 그때부터 후배들이 보낸 책과 편지를 꼼꼼히 보고 답장을 쓰셨습니다. 오후 9시면 잠자리에 드셨고요. 그분께는 정해진 일상의 ‘틀’이 있었지요.”


편운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 전윤호씨(39)는 편운의 엽서를 받은 적이 있다. “보내드린 시집을 읽고 직접 만든 엽서에 친필로 평을 써서 보내주셨더라고요. 워낙 자상하기도 하셨지만, 그 엽서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요….”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처음 이전 다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