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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의 《거 울 단 계》외..
라캉 Lacan, Jacques
프랑스의 정신 의학자이며 정신 분석학자인 라캉(1901-1981)은 1932년 파라노이아(편집증)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으며, 1936년에 유명한 '거울상 단계' 이론을 제시했다. 국제 정신 분석학 협회에서 제명당한 뒤, 자신의 학파인 파리 프로이트 학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는 책을 많이 내지는 않았지만 방대한 세미나가 편찬되어 나오고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표어를 내걸고, 정신 분석학을 '생물학화하는' 미국 학자들의 경향을 비판했다. 정신 분석학의 핵심은 '말'에 있으며 무의식은 언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사상이다. 라캉은 정신 분석학을 통해 주체의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투명한 자아 의식으로서의 주체, 데카르트의 '코지토'는 거부되며, 무의식의 존재가 강조된다. 라캉은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그곳에 존재하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생각한다"는 말로 데카르트의 말을 뒤집는다.
대표작 『선집』(1966), 『세미나』(1953-1980)
- 이글은 : 엘리자베스 클레망 외 3인, 이정우 역, '철학사전', 동녘출판사, 1996.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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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Lacan, Jacques 1901. 4. 13~1981. 9. 9]
프랑스의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철학, 정신분석학
출생지 : 프랑스 파리
< 상세정보>
파리 출생. 고등사범학교에서 처음에는 철학을 배웠으나 후에 의학 ·정신병리학을 배웠다. 1932년 학위를 취득한 후 평생을 정신과의사 및 정신분석학자로 지냈다. 1966년 논집 《에크리 平crits》의 간행으로 갑자기 유명해졌으며, M.푸코 등과 함께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라캉은 말년까지 무려 4백만 명이 넘는 환자를 상담하고,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하여 ‘프로이트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인간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는 것이다. 말이란 틀 속에 억눌린 인간의 내면세계를 해부한다고 하여 정신분석학계는 물론 언어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것은 환자를 치료하는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되었다. 그의 사후 E.루디네스코가 쓴 《자크 라캉:삶의 개요, 철학체계의 역사》(파야르 간행)가 방대한 분량(700면)으로 출간되었다. 저자는 라캉의 학문적인 업적은 인정하나 그의 거칠고 차가운 성격에다 여성편력이 심했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이론에 집착하여 독선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하였다.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그를 ‘프랑스 인텔리겐치아의 마지막 거장’이라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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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상을 찾아서] 라캉의 ‘정신분석’ (조선일보)
"자아는 거울속 이미지일뿐...프로이트 이론 이어받아 라캉이 목표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우리가 보통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나'(전문적인 용어로는 '자아')는 실제로는 상상의 구조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이것은 라캉의 유명한 개념인 '거울 단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처음 자신의 육체를 '조각난' 것으로 여기다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다른 생물체라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한다는 것. 거울 속의 이미지는 자아의 개념 형성에 필수적이고, 그 결과 자아의 개념 속에는 반드시 상상계가 스며들게 마련이다.
둘째, 욕망은 근본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며 정신분석은 그 욕망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라캉은 헤겔로부터 이어받은 이런 욕망의 이론을 통해, 성욕 일변도인 프로이트의 이론(범성욕주의)에서 벗어난다. 라캉의 욕망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한 번 먹으려 해도 타자를 불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는 언어를 매개로 한 사랑의 요구가 된다. 그것은 곧 생물학적인 욕구가 언어에 의해 요구로 굴절되면서 그 둘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차이는 언어의 속성상 욕구가 충족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언어를 타고 표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라캉의 정신분석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주체와 그의 진실이다. 라캉의 진정한 주체는, 말하는 주체를 통해 드러나는 욕망의 주체이다. '진정한 주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주체의 분열은 말의 차원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가령 "나는 밥을 먹고 있다"는 말에서, 밥을 먹고 있는 '나'와 말을 하고 있는 '나'는 다르다. 말에 의해, 말하는 주체와 그 말의 대상-주체로 분열되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진정한 주체는 그러한 틈바구니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문제는 대상-주체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말을 하는 주체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하는 주체가 문장의 표면에 몸을 드러내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크레타 사람의 역설이 그것이다. 여기서 말의 진실은 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한 주체에 있다.
이렇게 말하는 주체를 문제삼을 때 진실이 드러나는 말, 그리하여 말하는 주체가 말의 표면에 반쯤 드러날 수 밖에 없는 말을, 라캉은 '반쯤-말하기(mi-dire)'라고 한다. 따라서 라캉 식으로 말하면, 정신분석적으로 잘-말하기(bien-dire)는 항상 반쯤-말하기이다.
라캉의 주체와 욕망에 대한 이론은 알튀세르-들뢰즈-크리스테바 등 라캉 뒤에 오는 많은 철학자들과 메츠를 비롯한 영화이론가, 예일학파를 중심으로 한 문학비평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은 서구 철학에서는 독창적일지 몰라도 동양 철학, 특히 불교 철학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 알다시피 무아는 상주 불변하는 주체가 없다는 것이 불교의 근본적인 생각이다. 즉 일체의 존재가 무상한 것이니,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분별심에 의해 생성된 욕망이 언어를 타고 끊임없이 연기된다는 불교의 사상은 라캉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발한 라캉이라는 배는, 프로이트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불교 사상에 닻을 내린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라캉 의 《거 울 단 계》
1936년 8월 3일 오후 3시 40분. 라캉은 마리엔바트에서 개최된 제14차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거울단계』(Stade du miroir)라는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중요성은 결코 소홀히 평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논문을 통해 라캉은 정신분석 운동에 공식적으로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여러 해 동안 정신분석계에서 논의될 인간의 자아라는 개념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새로운 형태로 또는 변화된 형태로 평생 그를 따라 다니는 사상적 모티프가 되었다.
거울단계는 단순히 개인 성장사의 한 점을 차지하는 시기가 아니라 하나의 경기장(stade), 인간 주체의 싸움이 영원히 치러지는 그런 경기장인 것이다. 경기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라캉의 말장난과 비유적 재담은 처음 보기에는 장난스럽고, 자의식적인 문장 형식이라는 순간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장난은 그 뒤에 더 거대한 야망을 감추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인생 주기에서 개인의 인성이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는 최초의 순간을 찾아보자는 것이며, 나아가 정신분석이라는 도덕적 드라마의 새로운 시작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거울의' 순간에 대한 라캉의 설명은 자아의 탄생 신화와 자아의 타락 신화를 동시에 마련해 준다.
이러한 새로운 자아설 밑받침이 된 경험적 관측 사실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된 유아의 행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시기의 유아는 거울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보거나 어른 혹은 다른 아이의 모방적 동작에서 자신과 유사한 동작을 볼 때, 하나의 특징적 반응을 보인다. 유아가 이처럼 바라보는 순간은 극적인 발견을 하게 되는 순간이고, 막연하게나마 '나는 저거(거울에 비친 이미지)야' 혹은 '저게(다른 아이의 동작) 나야.'라는 명제를 구성하게 된다. 라캉은 아이의 기뻐하는 모습과 그 이미지에 매혹되는 태도 그리고 그러한 반응의 장난스러움을 주목한다. 이런 모든 점에서 유아는 같은 나이의 침팬지와는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행위(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것)는, 원숭이의 경우엔 거울 이미지의 허상이 파악되면 더 이상 원숭이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러나 원숭이와는 달리, 실제 아이에게서는 일련의 몸짓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움직임과 그 움직임 주변의 환경, 그 자신의 육체나 그 옆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 말하자면 아이가 모방하는 현실 사이의 관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아이의 즐거움과 유희는 좋은 뉴스가 별로 없는 라캉의 서술에서 사실상 사소한 역할만 할뿐이다. 거울 단계의 시기에 난생 처음으로 아이의 세계에 뭔가가 가물거린다. 아이는 이 때 음식, 안전, 안락 등을 얻으려면 여전히 어른에게 의존해야 하며, 또 자기 자신의 몸뚱이도 부분적으로밖에는 놀리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 거울 앞에, 비록 조잡한 형태이긴 하지만 하나의 자율성 또는 개인의 통제력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울 이미지는 이제 막 태어나기 시작하는 자아의 아주 자그마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작은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아이는 자아의 나중 모습이나 저 멀리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 있는 '성숙된' 자기, 자수성가한 어른, 그리고 사회적 성공의 희망 등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아이의 즐거운 유희는 장난을 잘 치고 방황하기 좋아하는 어른의 지능을 미리 말해 주는 예고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이와 거울만 있는 그 현장은, 비록 책임 있는 행위자(어머니, 유모, 아버지 등)로 생각될 만한 존재가 없더라도, 형성중인 아이의 자아에 거짓과 기만을 주입시킨다." 이런 주장이 라캉의 초기 논문에는 하나의 후렴구처럼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말하는 어조는 자신에 넘치는 권고의 어조이다. 라캉 이전의 정신분석학자들은 '겉으로만 정직해 보이는 것에 불과한 자아를 정직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이런 잘못된 생각을 폭로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거울에 비친 이미지(또는 이미지에 매혹되는 것)가 실제로는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인간이 진리를 향해 진보하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 표면만을 제공하는 빛이 없는 거울'을 넘어서야 한다.
무의식과 억압을 가장 핵심적인 프로이트의 용어라고 생각해 왔던 독자는, 이런 용어들이 라캉의 저작에서는 말석에 위치해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 대신 라캉 이전에는 정신분석학에서 별 의미가 없던 소외(alienation)라는 용어가 핵심어로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라캉은 거울에 사로잡힌 아이는 망상적인 자아 형성의 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신병원의 광기에 노출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라캉은 아이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이 뒤따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과 마르크스의 소외(Entfremdung)는 비록 프랑스어 alienation으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아이의 시련에 철학적 위엄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법적인 의미에서의 소외(재산권과 관련된)도, 희미하기는 하지만 법적인 절차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라캉이 소외와 그 유사어를 다루는 방식은 그 개념적 실체보다 '수사학적 표면'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alienation에 너무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어서 그 의미들이 서로 갈등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래서 소외가 가리키는 조건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이 없고 또 탈소외의 처방이 아예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소외라는 용어가 쓸모 있는 것이 되려면,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라캉은 이와는 달리, 미묘한 변용(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것)에만 매달리고 있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1884년 「경제학-철학 수고」나 「그룬트리세」에서 소외의 뜻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개인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또 그 노동의 결과물(제품)에서도 소외되는데, 이것이 모든 소외 관계(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 개인과 그의 신체)의 원형이 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소외 개념을 제시한 다음, 그 소외를 극복하는 재통합의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소외라는 용어가 각 단계를 거쳐 나가면서 인간사회의 폭넓은 지형도 논리적인 정치 메시지를 제시해 주었다.
이에 비해 라캉의 소외는 마르크스와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우선 거울 단계에서 발생한 원형적 소외가 사회에 침투되는 방식은 산만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라캉의 가설에는, 소외가 조직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임상적 자료가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런 지형도나 메시지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만다.
라캉의 주장은 인간은 적정 시기보다 일찍 태어난다. 그래서 인간이 운동신경을 완전히 장악하고 또 자발적인 행동을 할 수 있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거울 이미지는 '나'의 신기루이며, 아이가 나중에 획득하게 될 통합 조정의 잠재적 능력이 언젠가는 실현될 것임을 예고한다. 실제로 거울 이미지는 이런 능력의 발달을 촉진시킨다. 여기까지는 라캉의 설명을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소외적 방향'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개인(아이)이 영구히 자기 자신과 불화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동결(고정)시킬 수 없는 주체의 과정을 끊임없이 동결시키려-즉, 늘 움직이는 장 인간의 욕망을 고정시키려-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종에는 이런 소외시킬 수 없는 소외가 있다. 그러나 이 소외는 잡종의 철학적 언어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괴기 소설을 연상시키는 어조로 설명되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벌써 오래 전에 자아의 '구성성'을 설명해 놓았다.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서로 갈등하는 힘이 작용하는 장, 자아가 그 본령을 지키기 위해 동원하는 방어장치 등을 프로이트는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라캉은 이런 자아 형성의 과정을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부품들을 끌어모아 인간 주체의 내부에 단단히 무장시킨 기계적 인간을 만들어 내고, 그 인간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습관과 파괴적인 욕구를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주체의 자기분열은 프로이트의 꿈 연구로 처음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라캉에 의해 하나의 악몽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라캉은 '파편화된 신체'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공식 용어로부터 과감하게 일탈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환상은 자아의 '소외하는 동일성'과 구조적 관계를 맺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환상을 통해 개인은 아주 어릴 적의 신체적 불안정성에 대한 기억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릴 적에 신체가 전반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런 기억과 관련된 불안이 안전한 몸을 가진 '나'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촉진시킨다. 그런데 자아를 향한 이러한 투사는 파편화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인력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 그리고 자아의 단단한 무장은 오히려 개인에게 하나의 폭력을 가하여 또다시 그의 파편(disjecta membra)을 흩뿌리게 한다.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라캉에게도 동일시는 정신적인 장치의 주요 동기이다. 동일시는 활력의 원천이며, 개인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극적인 상호관계의 촉진제이다. 그러나 라캉은, 동일시라는 기제가 막강한 설명력을 가지려면 아주 초창기의 원형 상태에서부터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시작될 즈음에는 아이가 이미 너무 커 버렸고, 또 아이의 동일시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 동일시의 원칙에만 바탕을 둔 설명은 어색하거나 불분명한 것이 된다는 주장이다. 라캉은 오이디푸스 단계가 촉발하는 경쟁의식과 별명짓기 놀이를 넘어서서 그보다 앞 단계를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즉 어린아이가 단 하나의 욕망 대상, 단 하나의 별명인 자기 자신만을 갖고 있는 그 전의 세계를 주목하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적 동일시를 최초의 근원적 순간-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가장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순간-으로 파악했으나, 라캉은 오이디푸스가 2차적 순간이며, 자아를 진정시키고 정상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오히려 라캉은 파괴적이고 문제적인 최초의 동일시가 거울 단계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라캉은, 거울 단계에서 주체의 내부에 동일시 기제가 진행되면 이것이 나중에 시각적 지각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한다. 그의 논지는 바로 자기동일시의 원초적인 충동이 거울 너머의 세계에서도 무한히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거울의 이미지는 가시적 세계의 문턱이 될 것이다" '거울'과 '장관'은 나중에 라캉이 상상계라고 명명하는 세계의 구역을 확정짓는 양대 기둥이 된다.
자아 형성과 '인간 지식의 일반적 구조' 사이의 관계는 계속 진행되면서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면 '영원성'과 '정지'는 자아의 영역에서 볼 때 경험의 유동성으로부터의 일방적 후퇴 혹은 유동하는 욕망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른 데에서는 사색의 필수적인 도구가 된다. 가령 조금이라도 정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올바른 의미의 세계인 '상징적 다음성'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자아와 지식의 평행 관계는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즉 자아의 구조와 지식의 구조가 소외의 의지 혹은 추구된 광기의 의지에 의해 전형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외견상 대답할 수 없고 처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 라캉이 드러낸 거대한 규모에 비해 볼 때, 프로이트의 이론을 재해석한 그의 논지는 너무 빈약했고, 라캉이 나중에 정신분석의 '근본'이라고 지명했던 두 가지 개념(무의식과 전이)이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특히 눈에 띈다. 그리고 프로이트에게는 물론이고 후기의 라캉에게도 아주 중요한 구조적 개념이면서 영원히 이론적 추론을 촉발시키는 개념인 무의식은, 이 단계에서 아직 '활성화되어 있지도 않은데다가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에 불과하다. 바꾸어 말하면, 이 시기의 라캉은 정신분석이 곧 자아와 상상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처음 거울을 보고 그 속의 나를 자아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내 속에 그려진 모습으로 보고자 하는 것과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내가 바라본 나의 거울 이미지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이미지와 같다. 내가 나 자신을 직접 보지 못하고 거울을 통해 바라보듯이 우리는 타인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항상 우리 마음속에 그려진 즉 거울에 비친 타인을 바라볼 뿐이다. 자아가 타인에 의해 형성되듯이 타인은 우리(나)에 의해 형성된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나는 그 사람 그대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내 마음에 그려진 그 사람의 이미지를 사랑하게 된다. 그 이미지는 조금은 과장되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을 그렸을 수도 있고, 그 사람과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이미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내 속에 그려진 이미지를 사랑한다. 그와 이미지가 다른 부분을 발견했을 때 나는 내 마음속 그 사람 이미지를 수정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내 마음속 이미지에 맞출려고 한다. 자아가 타인에 의해 형성되지만 끊임없이 주체적일려고 하듯 내 속의 이미지 또한 주체적이길 원한다.
그렇다면, 거울 이미지의 허상을 알게 되면 흥미를 잃는다는 원숭이는 허상을 깨고, 실체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이다.
우리는 거울처럼 깨어질 수 있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
만일 그것이 허상이라면 그것을 깨부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
위에서 이야기 "한 인간이 진리를 향해 진보하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 표면만을 제공하는 빛이 없는 거울'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 참고문헌 -
《라캉》 맬컴 보위,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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