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4/10(화) 19:35 (MSIE5.0,Windows98) 211.55.55.179 1024x768 최정례, [사슴이 장대에 올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 -청산별곡 식으로               최 정 례 빨랫줄에 빨래가 날면 사슴도 줄을 타고 함께 뛰었지 그 때만 해도 사슴이 장대에 올라 해금을 켜는 걸 들었지 듣다가 듣다가 항아리 속으로 저녁이 뛰어들어 술을 익혔지 처마가 기울고 들판이 기울어 함께 들었지 그 때만 해도 유월은 목단하고 매화는 파랑새하고 연애했지 복사꽃 뜬 냇물이 알을 낳던 시절이었지 알이 말을 낳고 말이 또 알을 낳고 그 때만 해도 왕은 알에서 나왔지 왕도 사슴이 장대에 올라 해금을 켜는 걸 들었지 듣다가 장대에 올라 함께 울었지 그 때만 해도 얄리 얄리 얄랑성이 있었지 얄라리 얄라가 있었지 <창작과 비평, 1999. 봄호> -------------------------------------------------------------------- <시 속의 행간 읽기> 최정례의 시, 「사슴이 장대에 올라」 살어리 살어리 랏다, 화투패나 떼면서   ― 민화(民畵)                                                                        이향지 / 시인  화투를 한 모 샀다. 산수유 개나리 샛노란 꽃 소식이 물밀 듯 밀어 오르는 봄날. 24시간 편의점에서 화투 한 모를 사왔다. 최정례의 시「사슴이 장대에 올라」를 읽다가, <유월은 목단하고 매화는 파랑새하고 연애했지>라는 구절이, 느닷없이 화투 생각을 불러냈던 것이다. 화투라는 안경을 쓰고 들여다보니「사슴이 장대에 올라」는 영락없는 화투 시였다. <빨랫줄에 빨래가 날면>까지는 단순하게 바람 때문에 빨래가 나는구나 생각했지만, <사슴도 줄을 타고 함께 뛰었지>가 겹쳐지면서 '시월 단풍' 열 끗 짜리에 그려진 사슴을 연상시켰다. <술을 익혔지>는 '구월 국화'를, <처마가 기울고 들판이 기울어>는 세상이 캄캄해 졌으니 이제 곧 '공산명월'이 뜨겠군 싶었다. '칠월 홍싸리'는 멧돼지가 싫어서 건너뛰고, <유월은 목단하고>는 노랑나비 두 마리가 모란꽃 주위를 돌며 연애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오월 난초'는 뿌리를 찢어서 심는 풀꽃이라 행간에 묻고, '사월 흑싸리'와 '삼월 사쿠라'는 이름이 더러워서 건너뛰는군 싶었고, <매화는 파랑새하고>는 '이월 매조' 매화 등걸에 앉은 파랑새를 만나고 싶게 했다. <왕>이란 단어는 정월 '솔 광'의 학을, 동짓달 '똥'의 화분 모양의 잎사귀는 해금의 공명통을, <장대에 올라 함께 울었지>는 섣달의 '비'를 연상시켰다. 화투라는 안경을 두 눈에 딱 붙이고 보니 그랬다. 꽃 피고 달 뜨고 새 우는 달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꽃이 그려진 6월과, 가장 어렵게 핀 꽃과 가장 색깔이 고운 깃털을 가진 새가 <함께>그려진 2월을 <연애했지>와 맺어놓아서 더욱 그랬다. 거기에다 가락이 유쾌하고, 시속에 불려나온 사물들이 모두 친근한 것들이어서, 되풀이 읽다보니 나도 어느 틈에 그 시속에서 같이 놀고 있었다. 그 옛날 목단꽃 수놓은 이불보 만들어 시집 간 언니 생각도 나고, 양단 치마 저고리 입고 친정 온 언니와 형부 붙들고 용돈 따먹기 화투 치던 생각까지 났다. 시속에서나마 화투짝 주고받으며 최정례와 며칠 놀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화투가 없었다. 일년 열두 달 마흔 여덟 장에 덤까지 두 장 얹혀있는, 파르르한 화투 한 모는 사들고 왔지만, 누구하고 치나? 화투는 짝이 없으면 못 치는 물건이구나. 화투는 짝이 안 맞으면 못 먹는 물건이구나. <그때만 해도> 내가 원하기만 하면 화투를 같이 쳐주겠다는 누구누구가 있었지. <그때만 해도> 딱딱 소리나게 화투짝을 받아주겠다는 담요 쪼가리가 있었지. <그때만 해도> 내 몸은 <복사꽃 뜬 냇물>이었지. 靑山은 흘러가고 靑丹도 놓쳤구나! 살어리 살어리 랏다, 화투패나 떼면서!  우러라 우러라 새여 / 자고니러 우러라 새여 / 널라와 시름한 나도 / 자고니러 우니노라 /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최정례와 나는 겨울 송천을 같이 걸었다. 송천(松川)은 '솔다', '조붓하다'는 뜻이 와전되어 소나무 '松'자 송천으로 굳어진 이름이다. 백두대간 소황병산에서 발원하여 정선의 여량 아우라지에서 골지천과 합류하여 조양강이 된다. 백두대간 금대봉에서 발원하는 골지천(骨只川)이 송천보다 조금 더 길기 때문에 남한강의 원류이자 한강의 원류라는 이름을 골지천에게 빼앗긴 처지지만, 송천 또한 남한강의 원류임에는 틀림없다. 골 깊은 산골을 구절양장 돌아 내리는 송천 물줄기는 물목이 좁고 낙차가 큰 만큼 급하고 콸콸하다. 송천과 골지천이 합류한 조양강은, 동남천 오대천 등을 합수하여 동강이 되고, 동강(東江)은 흘러흘러 남한강이 된다. 우리는 송천 물길을 거슬러 오르지 않고, 물길 따라 내려오는 코스를 택했다. 입춘 뒷날 서울을 떠나서 다음다음 날 돌아오는 2박3일의 여정이었다. 강릉시 왕산면 소재 수하호에서부터 정선군 북면 구절리까지 구절양장 굽어 도는 물길을 따라 걸어나온 긴 길이었다. 수하호 수문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반긴 것은 허공에 자자한 겨울 햇살 뿐. 눈조차 드문 가뭄이 계속된 탓인지 호수의 물은 바닥까지 내려가 있었다. 꽁꽁 얼어있었다. 호수 옆 포장도로를 뒤로하고, 마른 강을 따라갔다. 대궁이가 누렇게 마른 갈대들이 골짜기 바람에 허리가 꺾여있었다. 그 갈대들 허리가 좀 더 깊이 꺾이면 봄이 올 것이었다. 새싹이 돋아날 것이었다. 여름 장마철에는 물이 넘쳤을 계곡에선 물 흐르는 소리 그치고,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자갈밭이 나오면 자갈밭을 걸었다. 길이 산으로 올라가는 깊은 물굽이를 만났을 때, 우리는 길을 버리고 물길로 들어섰다. 꽁꽁 언 강물 위를 갈대줄기 버들가지 잡고 미끄럼을 타면서 내려갔다. 미끄럼을 타다가 길이 옆으로 오면 다시 길로 올라가고, 길이 멀어지거나 가팔라지면 다시 물줄기를 탔다. 배나드리 다리 아래는 드넓은 빙판이 펼쳐져 있었다. 배나드리에는 제법 큰 마을이 있었는데, 우리는 아무 준비도 없는 음식점을 찾아, 메밀가루가 국수가 되어 익을 때까지 빙판에서 놀았다. 최정례는 동네 아이들 썰매를 빌려 타고 익숙하게 얼음을 지치며 돌아다녔다. 나는 빙판에서 놀아본 경험이 없어서 자갈밭에서 사진만 찍어주고 있었다. 최정례는 자갈밭에 서있는 내 앞으로 썰매를 밀고 와선 채를 잡혀주며 선생님도 한번 타 봐 했지만, 조그만 판대기에 올라앉기엔 내 엉덩이가 너무 컸다.  한터라는 마을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었다. 귀틀집 방 둘을 빌려서 하룻밤을 더 묵었다. 우리 일행은 여덟 명이었는데, 최정례는 처음 만난 아가씨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서 저녁을 짓고 있었다. 거대한 무쇠 솥 걸린 아궁이 앞에서 군불을 지피는 최정례의 모습은, 그 부엌에서 수십 년 일을 해온 여자처럼 능숙했다. 서툰 구석이 없었다. 나는 이따금 내려가서 최정례가 앉혀놓은 닭도리탕을 휘휘 저어서 감자를 뭉그러뜨렸다. 최정례는 질겁을 하면서 시어머니는 제발 들어가 계슈 했지만, 나는 아예 장작개비를 눕혀서 깔고 옆에 앉아서 같이 군불을 지폈다. 밤이 되자 좁은 골짜기는 초롱초롱한 별들로 뚜껑이 덮이고, 우리가 다투듯이 장작을 밀어 넣은 탓에 방바닥은 불이 날 지경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장작을 너무 많이 때서 그렇다고 탓을 해가면서, 까맣게 잊고 살던 즐거움에 취했다. 우리가 시절 따라 도시에서 사느라 잊었던 장작불이며 연기며 그을음이며 구들장 위의 아랫목이며 펄펄 끓는 방바닥. 그날 밤 우리는 까마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잃어버린 고향에 도착하고 있었다. 뜨거운 구들장을 지고 나란히 누워서 고생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느라 새벽이 오는 줄도 몰랐다. 등 짝이 너무 뜨거우면 창호지 바른 쪽문을 활짝 열어 타는 방바닥을 식히곤 했다. 좁은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오는 밤바람 소리 천군만마가 달리는 듯 했지만, 나는 '구절리 바람소리'에는 이골이 난 여자. 최정례에게는 어디가 어딘지는 몰라도 나를 굴뚝같이 믿어주는 마음이 있었다. 날이 밝자 강줄기를 따라 홀린 듯 다시 걸었다. 그 짧은 도보여행을 같이 하는 동안에 나는 최정례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었고, 수수함과 깊음에 깊이 끌렸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슴이 장대에 올라」를 읽게 되었던 것이다.  < 빨랫줄에 빨래가 날면 / 사슴도 줄을 타고 함께 뛰었지 / 그때만 해도 / 사슴이 장대에 올라 해금을 켜는 걸 / 들었지 / 듣다가 듣다가 / 항아리 속으로 저녁이 뛰어 들어 / 술을 익혔지 / 처마가 기울고 들판이 기울어 / 함께 들었지 / 그때만 해도 / 유월은 목단하고 / 매화는 파랑새하고 / 연애했지 / 복사꽃 뜬 냇물이 / 알을 낳던 시절이었지 / 알이 말을 낳고 말이 또 알을 낳고 / 그때만 해도 / 왕은 알에서 나왔지 / … / 그때만 해도 / 얄리 얄리 얄랑성이 있었지 / 얄라리 얄라가 있었지 ('사슴이 장대에 올라' 부분)>      나는 무엇보다 이 시의 유쾌한 운율에 빨려들었다. 나도 <그때만 해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우리 세대가 거쳐온 농경생활의 색조와 분위기를 띄면서도,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처리되어서, 재미도 있고 공감의 폭 또한 크다. 민화처럼 겉으로 드러난 색조는 촌티 나고 낡아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영롱한 진면목이 드러난다. 송천 가 귀틀집에서 스스럼없이 군불을 지피고 저녁을 짓던 최정례의 모습이 이 시와 겹쳐지면서 나는 한량없는 감동에 사로잡혔다. 우리들이 잊었던 동화가 어울려 있었고, 거슬러 올라가면 알에서 왕이 나오던 신화의 세기까지 연결이 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이 시의 밑그림에 잔잔한 슬픔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이 시가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먼 시간, 더 멀고 투명한 시간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도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두 마리의 사슴이 등장하는데, 빨래 잡으러 뛰는 [사슴] 즉 현실과, 해금을 켜는 [사슴] 즉 이상이, 괴리와 반목 없이 가장 아름답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은 <그때만 해도>라고 부를 수 있는 과거의 시간 속에만 존재한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의 희망이나 이상은 결코 과거 쪽으로 되돌아가자는 데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는 화투짝에 그려진 사슴처럼 고개를 젖혀 뒤를 돌아보게 하지 않는가.  이링공 뎌링공 하야 / 나즈란 디내와 손뎌 / 오리도 가리도 업슨 / 바므란 또엇디 호리라 /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나는「사슴이 장대에 올라」를 읽고 화투를 한 모 소장하게 되었지만, 아직 쳐보지는 못했고 넋두리만 한 줄 얻었다. 반 모 짜리 화투가 반 모 짜리 화투를 치니, 가던 새가 보겠는가 오던 새가 듣겠는가. 나마자기 구조개가 제 발로 걸어와서 저녁 밥상에 오르겠는가. 살어리 살어리 랏다, 화투패나 떼면서! 벗이 올라나? 님이 올라나? 배부른 독이 살찐 강술을 빚어지고 비틀거리며 올라나?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현대시학, 1999.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