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5 : [서평/이성부 시집/지리산], 사족(蛇足)에 대하여

◎ 2001/7/26(목) 20:52 (MSIE5.0,Windows98) 211.104.141.80 1024x768

[서평/이성부 시집/지리산], 사족(蛇足)에 대하여

이성부시집 《지리산》

사족(蛇足)에 대하여

이 향 지

이성부 시집 《지리산》은 지리산을 소재로 한 역대 어떤 장르 어느 문사의 유산기 문학작품보다, 이 산의 심정에 깊이 닿아 있다. 그것은 그가 유산가가 아니라 등산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느 누가 《지리산》을 이처럼 샅샅이 살펴 드러내었던가. 그 산중을 떠도는 원혼들을 누가 이처럼 살뜰히 거두어 위로해 주었던가. 그러나, 한 마리의 뱀을 완벽하게 그린 뒤에 발 넷을 그려 넣음으로써, 오히려 불편해진 그림. 이성부 시집 《지리산》은 바로 그런 예에 속하기도 한다.

이성부 시집 《지리산》시편들에는 〈내가 걷는 백두대간〉이란 부제가 일련번호를 달고 붙어있다. 그러나, 이 시집에 실린 82편의 시 중 백두대간에서 쓴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백두대간보다는 지리산 주릉으로 통하는 길목 마을이나, 이름난 골짜기, 무수한 갈래능들, 그 갈래능들에 솟은 봉우리들, 이 산 그늘에 얽힌 사람들의 흔적과 그 아픔 들추기에 더 많이 할애되었다. 이제는 많이 알려져서 모르는 분이 없겠지만, 백두대간이란 강물과 강물을 가르는 분수령을 말한다. 그러므로, 백두대간을 답사 또는 종주 한다는 것은, 이 분수령의 마루금을 따라 걷는다는 뜻이다. “분수령은 물을 건너지 않는다”는 움직일 수 없는 명제를 떠올릴 때,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편들은 〈내가 걷는…〉이란 부제에 걸맞지 않은 것들이다. 또 백두대간 상에서 썼거나, 백두대간을 바라보면서 그곳을 썼다고 보이는 시들마저도 서시 〈산경표 공부〉를 제외하면, 백두대간 자체의 존재의미에 접근해보려는 시도나, 굳이 그 길을 택해서 걷게 된 사람의 변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랫동안 지리산 고샅 고샅을 오르내리며 많은 이야기를 들추고 보니까, 마침 이 산의 주능선이 백두대간에 속하는지라…. 이런 안이한 동맹이 빚어낸 결과일까? 아닐 것이다. 그는 '깊은 밤에 한두 번씩 손을 씻으며 글을 쓰'(〈그 산에 역사가 있었다〉부분)는, 그야말로 자신의 글에 세상의 먼지 묻히기를 지극히 꺼려하는 염결성에 기대는 사람이다. 그런 쪽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그가, 반박의 여지를 다분히 안고 있는 부제를 《지리산》시편 모두에 일련번호까지 붙여가며 무리하게 실어놓은 이유는, 정말 무얼까? 그것은 아마 그가 백두대간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거나, “그 집안의 용마루가 백두대간이면, 용마루 아래 것들은 모두 백두대간이다”는 식의 뿌리깊은 계보주의, 족보주의적 발상에 매료된 탓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에 정립된 '산경표'라는 것도, 이 땅의 산줄기들을 족보식으로 서술해놓은, “산줄기족보”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모든 산을 백두산 장군봉을 정점으로 삼아 간추려놓은 산줄기족보. 그야말로 모든 권력이 왕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던 시대의 산물이다. 이 산경표의 내용, 이 산줄기 족보의 내용이,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오히려 소중하고, 큰 공감을 얻고, 빛을 발하는 이유는, 개화기의 침략자 일인들이 규정하여 지금껏 교육현장에 방치되어 있는 산맥체계보다, 우리 국토의 특성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에 훨씬 효율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단순히 이민족의 탄압에 파묻혀 있던 '우리 것 되살리기' 식으로만 이해하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 유명세를 빌어 다른 것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시와 산, 양면에서 땅과 사람의 아픔 들추기에 오래 천착해온 그가, 깊이 고려하지 않고, 그 대상의 실체와 의미를 오도할 수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면, 분명 잘못이다.
이 시집은 그냥 《지리산》이면 충분하였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부제 없이 가는 편이 훨씬 담백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내가 걷는…〉이란 부제는 해당 시편에만 붙였어야 더욱 가뿐하였을 것이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이란 부제가 붙은 이 시들은 반도의 남쪽 지리산에서부터 북쪽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내가 걸어가 보아야겠다는 산행계획과, 이 계획의 실행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했던 점들을 시로 써야겠다는 욕심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욕심이 있었으므로 그 욕심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생이다. 그런데도 아직 산행이든 삶이든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도 개운치 않았던지, 시집 뒤편 〈시인의 말〉에서 술회하고 있다. 시인이 시를 잘 쓰겠다는 욕심은 오히려 존경받을 덕목이다. 그러나, 그가 이 말에서 정말로 간과하고 있는 욕심, 그것이 문제였다. 산이 사람을 끌어안고, 사람이 산에 기대어 함께 해온 역사 그 자체를, 백두대간의 존재의미와 겹치거나 동일화 시켜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백두대간은 관념이 아니라 실체다. 실존하는 산맥이다. 사람이 손을 대어 일부러 훼손시키거나 지각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땅은 그 형질을 바꾸지 않는다. 우리 국토의 등뼈 산맥 백두대간도 그러할 것이다. 한 시인이 그 명칭 좀 빌어 썼기로, 닳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류는 오류를 낳는다. 특히 지명도가 높은 분들이 한 말씀을 하면 금과옥조처럼 믿는 경향이 있다. 그 예를 하나 들겠다. 2001년 7월4일자 조선일보 19면, '7월의 거울'난에 재 수록 된 그의 시 〈지리산〉에 딸린 이숭원의 촌평이다.

'이성부 시인이 백두대간을 오르내린 지가 20년이 넘었을 겁니다. 거의 날마다 산을 올라도 저 멀리로 달아나 버리기에...'

그가 정말 20년을 백두대간을 오르내렸는가? 그가 매일 산을 오르내렸는가? 마음 아닌 몸이 정말 그렇게 하였는가? 뱀을 다 그린 후에 발 넷을 그려 넣음으로써 부추긴 오해. 그 증거가 여기에 있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공동묘지를 만들거나, 댐을 만들어 수장시키거나, 광맥을 찾느라 발부리와 가슴을 파헤치고 끊는 것만이 훼손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지리산》 시들은 얼마나 겸손하고 넉넉하며 아름다운가. '흐르는 물이 저를 벗어 제 속을 맑게 보여주듯이/내 속을 드러내는 나를 내가 본다'(〈한신골에서 나를 보다〉부분). 그는 이렇게 지리산을 걸으며 자신을 닦으며 다시 일으켜 세워왔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왔으나/지리산은 그들을 살려서 내려보내지 않았다'(〈대성골에서 비트를 찾아내다〉부분), '지리산은 자기 품에 안긴 사람들을/거두어들여 자기의 몸으로 만들었다'(〈젊은 그들〉부분). 그가 오랫동안 제 몸을 부수어 가며 비로소 엮어내게 된 이 한 권은, 한 판의 살풀이굿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그의 오랜 헌신으로 한 많고 배고프고 발길 무거워서 하늘에 오르지 못한 지리산 원혼들은, 그 무겁고 슬픈 옷을 벗어 던지고 하늘로 훨훨 오를 수 있으리라.

*<현대시학> 2001년 8월호, 게재.